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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13. 10:53 성경이야기/구약

https://www.youtube.com/watch?v=qIOhMj8FLSs

사역 가운데 가장 일중의 하나는 주일 설교를 준비 하는 것입니다. 담임목회를 처음 시작 했을 당시, 한동안은 말씀의 소재를 찾지 못해서 남의 설교를 베께서 적도 있읐습니다. 후에, 은혜를 주셔서 남의 설교를 베끼는 일은 없어졌지만, 말씀이 깨달아질 때마다 마음에 두려움을 가젝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도 중의 구절입니다.

 

제가 2014년도에 내쉬빌을 떠나 아틀란타로 왔습니다. 내쉬빌은 사역을 내려놔야 했을 만큼 아픔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막내가 마음 속에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가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을 용서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용서하지 못했다고 대답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아이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 아빠는 목사면서 성경에 있는대로 안하세요?” 아이가 내민 말씀은,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내쉬빌을 떠나기 , 가정과 저녁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스스로는 그들에게더 이상 미움이나 불편한 마음이 없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아이 앞에서 쑈를 것이지 속에 그들에 대한 미움을 버린 것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후에, 사실을 알고 기도 하던 , 작은 사건 하나를 경험하게 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게 , 은혜를 다시 경험하면서 그동안 마음 속에 있었던 미움을 버릴 있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난 주에 전했던 말씀을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주에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냥 우리에게 주신 교훈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하는 계명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기에 죄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것이며, 믿음없이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시작 하면서 오늘의 본문을 끌고 오는 질문을 다시 돌아보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출발점은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묻는 물음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을 우리에게 이어서 하신 것입니다.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단어들은, “둘째”, “이웃”, “ 자신 같이그리고 40절에 나오는 강령이라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이웃 누군지를 정의하고. “ 자신 같이라는 말을 살펴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라는 말과 계명, 강령 함께 생각해 것입니다.

 

 

첫째로, 누가 이웃입니까?

 

오늘 말씀의 주제는 출애굽기 20:12 이하에 나오는 6-10계명입니다. 구절에는 부모공경 비롯해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그리고 탐심 이야기 합니다. 모든 구절은 사람과 사람 혹은 이웃과 이웃간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많이 들으셨겠지만,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이라면, 6-10계명은 우리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말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이 되기 위해 십계명에는 여러가지 행위의 기준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이웃이 되기 위해 다른 몇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지만, 읽어 보겠습니다.

 

5:38-47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말씀은 십계명과 더불어 우리가 이웃에게 혹은 주변에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님께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과 동등한 계명이라고 말씀 하셨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금 생각 해보게 되는 것은 누가 이웃인가? 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마태복음 22장과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율법교사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리고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은 자리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러자 예수님께 질문했던 자는 자비를 베푼자 이웃 이라고 답합니다.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비유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구절을 보면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웃에 대해 무엇을 말씀 하려고 하시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누가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이와 같이 하라!” 것이 답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하라!” 대답이 돌아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누가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누군가의 이웃이 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떻습까?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은 이웃입니다. 도움이 되지 않으면 무시 당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사랑은 커녕 세력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욕먹는 이유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어서 욕을 먹습니까? 아니면 교회 안에서 세상보다 추한 모습을 보여서 욕을 먹습니까? 우리가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상황입니다.

 

말씀이 저에게 도전이 되는 이유는, 말씀은 네게 도움이 되는 이웃을 찾으려 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이웃이 되라!” 하시는 음성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삶에 들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군가 이웃이 되기를 기대 하지말고, 먼저 네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라!” 말씀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주변을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도 건강이

앞서 읽은 마태복음 5:38 말씀에 보면 우리가 말씀 대로 살면 내가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분명히 누군가의 이웃이 되는 삶을 살도록 말씀 하십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누군가의 이웃이 되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내자신 같이 사랑하십시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여기서 우리가 봐야 단어가 있습니다. “같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단어는 헬라어의 wJ" 단어로, 뜻은 처럼, 같이, 똑같이입니다. 영어에서는 단어를 “as” 번역 했는데, “as” 가지는 가운데 “…맡큼이란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구절을 우리가 직역하면 몸과 똑같이혹은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어는 간단한 말이지만, 사실 단어가 가지는 무게감 대단합니다. 오늘 본문의 같이라는 단어는 주기도문에서도 사용 되었습니다.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단순하게 같이라고 하지 말고 똑같이라고 단어를 바꿔보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과 똑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혹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만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맞습니다. 그렇게 보면 단어의 뜻은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역시 용서하지 마시라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역시 사랑하지 마시라는 말씀이 되는겁니다. 여기까지는 이해 하신 줄로 믿습니다.

때문에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 자신과 같이 말을 심리학 적으로 접근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잠깐 심리학을 이야기 한다면, 네이버사전에서는 심리학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인간의 행동과 심리과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경험과학의 한 분야를 뜻한다. 인간과 동물의 행동이나 정신과정에 대한 다양한 질문의 답을 찾는 과학 중의 하나가 바로 심리학이다.

 

마디로, “심리학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학문으로 연결시킨 극히 인간 중심의 학문이다.”라고 있습니다. 사람 중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은 사람을 이해하고, 정신적, 감정적 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데,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없다 말씀으로 해석하고 전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것은, 우리가 말하는 신앙은 심리학적 해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문자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모세와 여호수아의 르비딤 전투를 말씀 드릴 , 여호수아는 430 종살이를 하던 사람들과 함께 나가 아말렉 군사들과 전쟁을 하고,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산에 올랐습니다. 장면을 생각 해보면, 싸움에서 이기는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그런데 그렇게 합니다. 훗날의 일이지만, 이스라엘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칼과 창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택한 승리의 방법은 순종이었습니다. 여기 어디에 심리학적 접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심리학적 접근 보다는 예수님께서 자신 같이라고 말씀 하셨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지금 마태복음 22장의 말씀은 우리가 함께 가고 있는 출애굽 광야 여정에서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 신약성경에서 찾아 설명하는 과정임을 잊지 마시고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십계명 돌판의 10계명 중에 1-4 하나님과 관련된 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 5-10계명을 이웃을 사랑하는 이라고 말씀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5-10계명을 살펴보면,

 

20:12-17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 살인하지 말라 

14. 간음하지 말라  

15. 도둑질하지 말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저들에게는 하나님과 이웃만이 존재합니다. 물론 아말렉과 같은 적들도 존재 하지만, 기본적으로 위로는 하나님, 옆에는 이웃이 존재 했습니다. 그렇다면 광야생활 동안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누구였겠습니까?

그래서 십계명의 5계명에서부터 10계명을 정리하자면, 제겐 말씀들이 이웃 사랑으로 보여집니다. 여기 어디에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기 위한 필수 조건도 아닙니다. 나를 사랑해야 이웃을 사랑할 있다고 주장 하는 것은, 남을 사랑하기보다 나를 사랑하기 위한 핑계일 뿐입니다.

 

제가 여러 운동을 좋아하는데, 중에 볼링이 있습니다. 제게 처음 볼링을 가르쳐 주신 분은 어렸을 적에 소아마비를 앓아서 다리를 많이 불편한, 구두 수선하던 형제였습니다. 어느날, 저와 볼링을 하고 싶다고 하시면서 볼링장으로 데려 가셨습니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넘어지면서도, 저에게 공을 던지는 법부터 차근 차근 가르쳐 주셨습니다. 생각에, 그분의 삶의 조건이 저보다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40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볼링장에 때마다 분이 생각납니다. 이후로 신체적으로 불편한 분들에 대한 개인적 편견이 많이 없어졌습니다.저보다 불편한 몸을 가진 그분은 스스로를 먼저 사랑할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심리학이 말하는 자신을 먼저 사랑했기에 저에게 볼링을 갸르쳐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심리적 극복 이전에 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신 분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웃고 감사하며 살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웃을 향한 계명을 지키는 것 심리적으로 완성되어서 한다기 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경험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것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 같이 보면서 자신 같이라는 말씀은 이웃 사랑의 자격 조건 아니라 이웃 사랑의 기준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의 병행 구절에서 주님은 저들의 질문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비유에서 깅도만난 사람을 도아 주었던 사마리아인, 만약 자신을 사랑해야 했다면, 강도가 나온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도망쳐야 했던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도망친 것이 아니라 다친 사람을 돌봐 주었습니다. 말슴을 하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말씀을 준비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컵에 설탕물이 들었으면 설탕물이 나올 것입니다. 만약 콜라가 들었다면 콜라가 나올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속에 채운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요? 바라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 이웃 사랑 하나님게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삶으로 감당하는 성도 되셔서 하나님 앞에 삶이 의롭다인정 받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웃 사랑도 계명입니다.

 

저는 지난 주에 말씀의 주제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계명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웃 사랑도 계명입니다.”라고 발씀 드리겠습니다. 22:39절을 다시 봅니다.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여기서 보면,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쓰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첫째와 같은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같이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헬라어로는 o{moio" 말입니다. 의미를 살펴보면, “…같은”, “유사한”, “닮은이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했던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켜야 계명이라고 말씀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다시금 깨닫게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신앙인이 쌓게 되는 덕목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생각을 보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고 일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말씀을 보면,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고 싶어하는 몇가지를 알수 있는데, 서로 사랑함으로 성도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낼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가지는, “ 계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지켜야 의무가 있는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욕을 먹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사랑해야 자와 싸워야 자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한국교회에는 영향력이 적은 일이라 생각하고 말씀 드린다면,

 

1: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이것이 죄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20:13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동성애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라면, 죽음에 이를 만한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나쁘다고 말하지만, 영혼에 대해서는 구원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싸우는 것이지 사람과 싸워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죄와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입니다.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한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영혼의 가치는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요즘 말하는 100세에 이르는 육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도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영혼을 위해서 무엇을 사용하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가치는 얼마나 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지금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의 영혼의 가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 30 전에 경제적으로 너무도 힘든 때에, 차가 한대 필요했습니다. 아는 분이 소개 주셔서 15년이 넘은 차를 2000불에 판다고 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소개 주신 분이 가격을 싸게 달라고 하는 뜻으로 제가 전도사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차주인이 하는 말씀이, “전도사님, 파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차가 링컨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전도사가 링컨 탄다고 말이 있습니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저는 “2000불짜리 15년이 지난 차인데요?” 라고 했더니, “새차 혼다나 토요타를 타면 말을 하지 않지만, 링컨을 타면 수근 거릴 것입니다.”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엔 차를 사지 못하고 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행동으로 말미암아 신앙생활에 지장을 받거나 맘이 불편해 진다면, 기꺼이 포기 있어야 하는 것이 이웃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은 이것을 계명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렉서스 탑니다. 대신 몇년도인지는 묻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이웃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웃사랑을 새계명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계명을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는, 내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이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당 하기 위해 몸부림 치며 기도 해야합니다.

제가 경험해 바에 의하면, 우리 인간의 성정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말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말이 있을 만큼 우리는 태생적으로 남이 나보다 되면 불편합니다. 그런 우리 성품은 다른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성령충만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웃사랑, 원수사랑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겁니다. 밥달라고, 세상의 달라고 잘되게 달라고 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은데 이것이 너무 힘드니 힘달라고 기도 하는 겁니다. 이웃 사랑하고 싶은데 마음이 그렇지 못하니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있게 달라고 기도 하는 겁니다.

 

오늘 말씀, 여러분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주님은 누가 이웃인가 보다 네가 이웃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웃 사랑의 기준은 무엇이빈까? 나를 사랑하듯 사랑하라고 하심으로 이웃 사랑의 기준이 나입니다.

이웃 사랑은 수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런데 감당할 자시닝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 합니다. 이웃을 사랑할 만한 되게 달라고

오늘 말씀의 제목 기억 하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이웃 사랑도 계명 이라네요!”

posted by no turning back
2021. 12. 13. 10:51 성경이야기/구약

https://www.youtube.com/watch?v=LyfMhJp9Z5o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연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고백하신 후에,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방법을 말씀해 주시는 장면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방법이 계명이란 모양을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슴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만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과 조건을 주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느 , 예수님에게 율법사(서기관)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병행 구절인 마가복음 12장에서 서기관의 질문은,

 

12: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22:37-38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먼저 오늘 질문을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사의 질문은 계명입니다.

다시 말해서 질문들의 주제는 한가지입니다. “크고 첫째되는 계명입니다. 저는 구절에서 계명이란 단어에 마음이 쓰입니다. 계명이란 말은 지키는 것이 당연하고, 안지키면 죄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히 우리가 지켜야 하는 계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믿는 것이고, 구약에서는 경외요, 오늘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말씀 드리면 믿음이라고 봐야 듯싶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시말해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딤후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믿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우리를 구원받을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다면 하나님이 인정 하시는 믿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과연 어떤 율법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을까요?

오늘 십계명의 첫부분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과 믿음의 모습을 보고, 결단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우리에게 말하는,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우리 말에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이란 말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말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사랑과 불륜의 차이가 무엇일까? 사랑이 사랑이 되려면 누구를 사랑하는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015 2 한국에서는 간통죄가 폐지 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할 있습니다. 하지만, 가정이 있는 사람을 사랑해서 다른 가정을 파탄 내고 나서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포장 되어도 결국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은 그것을 잘못 사랑이라고 표현할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대상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부분아닐까요? 저는 지난 주에 이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 해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다시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우리들이 사랑해야 대상은 다른 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애굽에 내려졌던 10 재안은 당시 애굽에 있던 신들을 상징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    나일 강과 그 밖의 물들이 피로 변하였다 à 나일 강의 신 ‘하피’가 수치를 당하였다. ( 7:14-25)

2)    개구리 재앙 à 개구리 여신 ‘헤카’에게는 이 재앙을 막을 힘이 없었다. ( 8:1-15)

3)    티끌이 이로 변하였다 à 주술의 신 ‘토트’는 이집트의 주술사들을 도울 수 없었다. ( 8:16-19)

4)    이집트 전역의 파리 재앙 à 우주의 창조자로 불리던 ‘프타도 이 재앙을 막을 수 없었다. ( 8:20-32)

5)    가축의 역병 재앙 à 암소의 여신 ‘하토르’, 황소의 신 ‘아피스’도 이 재앙을 막지 못하였다. ( 9:1-7)

6)    독종 재앙 à 치료의 신들인 ‘토트', ‘이시스’, ‘프타’도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9:8-12)

7)    천둥과 우박 재앙 à 번개의 신 ‘레슈푸’, 비와 천둥의 신 ‘토트’의 무력함이 드러났다. ( 9:13-35)

8)    메뚜기 재앙 à  이 재앙은 곡식을 지키는 다신의 신 ‘민’도 이를 막지 못하였다. ( 10:1-20)

9)    사흘 동안의 흑암 재앙 à 태양신이자 숫양으로 상징된 ‘라(아몬-)’도 이를 막지 못했다. ( 10:21-29)

10) 장자의 죽음 à 신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바로(파라오)’의 장자도 포함되었다. ( 11:1-10)

 

하나님이 애굽에 재앙을 내리셨던 이유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만이 진정한 이요, 하나님 되심을 이스라엘이 알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스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만 모르고 있었습니다.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그리고 지금 순간, 출애굽 하고 3개월이 지난 어느 , 시내광야에 진을치고,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이 반복적으로 말씀 하시는 부분입니다.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마음을 돌아 보라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사람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성향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세상에 아버지는 많습니다. 그런데 중에 아버지는 분일 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이런 저런 종류의 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에 신은 하나님 분이라고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과연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 맞는가? 아니면 내가 지금 믿고 있는 하나님은 과연 누구인가? 하나님이 아닌 거짓 신을 진짜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인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분을 하나님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고 계신 말씀은, “내가 이런 저런 능력이 있다. 그런데 내가 처음부터 너희를 형통의 길로 보내지 않았다. 이유는 네가 나를 제대로 보고 경험하고 믿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에게 자신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고 계신 것입니다.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구체적인 방법은, 4절에서 11절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일도 하지 말고 쉬라고 하십니다. 저는 과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정 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일반 신을 구별하지 못하는 같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이라고 하면서도 다른 신들의 도움을 받으려 하는 모습을 봅니다. 심지어 목사님들 중에도 교회의 부흥을 점집에 가서 묻는 분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다른 곳에 가서 가짜 하나님 혹은 거짓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24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죽음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처럼 말을 합니다.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여기서 알게되는 것은, 광야생활 40년에 가나안 정복전쟁 16, 도합 56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 하셨고, 전쟁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극복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도 애굽의 신들과 가나안 신들을 함께 섬기는 것처럼 보였는가 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겁니다. “너희가 저편의 신이든지 이편의 신이든지 누구를 믿든지 더이상 상관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여호와, 나의 하나님을 믿겠다

제가 여기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결정 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우리 사랑의 대상,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이미 선포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선언을 주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고자 하는 신이 지금 우리 하나님이십니까? 이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내가 믿고 있는 중의 하나인 하나님이 저편의 하나님입니까? 이편의 하나님 입니까? 아니면 정말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나의 여호와 하나님입니까? 지금 우리 믿음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아니라 누구를입니다. 오늘 우리 믿음의 대상이, 우리 사랑의 대상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확신하고 고백하는 시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방법은 둘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율법사와 예수님의 대화 속에서 예수님은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방법을 이렇게 설명 하십니다.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평행구절인 마가복음 12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차이는 마가복음에 힘을 다하여라는 말이 추가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이 마가복음이 최초의 복음서이고 마태복음이 나중에 쓰여졌다고 하니, 마가복음을 기준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확히 여기서 말하고 있는 방법과 십계명에 쓰여진 1-4계명이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이렇게 말씀 하실까요? 여호수아는

 

24: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입니다. 말은 다른 신을 따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아닐까요?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신의 모양을 만들어 절하고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고, 절하지 말라고 하는데,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만드는 우상 모든 것은 이미 하나님이 피조물로 만든 것들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에게 창조자의 위엄을 인정하고 절하는 것을 하나님은 없다고 하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길, 세상의 형상을 따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마치 나만 사랑해라. 다른 신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고 말씀 하시는 같이 들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만 생각하고 넘어가야 것은,  

 

20:4a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사람들이 우상을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너를 위하여…” 말씀은 우리에게 오늘 우리가 만들어가는 우상은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나를 위한 이라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은 우리가 신을 찾는 이유가 단순히 나를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나를 위해 존재 하시면서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해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우리는 우리를 위한 신을  찾는데,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6: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12: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의 필요를 챙기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 하시고 가족들을 애굽으로 보내서 새로운 이스라엘로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사랑한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한가지였습니다. “나의 백성이 되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고백 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 한가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과연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에 대해 나쁜 이야기 혹은 헛된 말들을 있을까요? 같은 관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비방하거나 혹은 욕하는 그런 말을 있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내가 높아지는 길이기도 합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4:8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저는 말씀을 보며 무언가 마음에 부딪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나는 항상 하나님이 나를 위해 ㅇㅇㅇ을 주시면,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조건을 달고 기도하곤 했는데, 오늘 말씀으을 다시 묵상 하면서 마음에 다시 닿는 것은, “그를 높이라 먼저이고 나를 높이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많은 순간 먼저 나를 높여 주시면…”이라고 기도 했었던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나를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안해준다고 투정하며, 순종하기 보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조건을 세우고 있는 나를 하나님은 변함없이 사랑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안식일 입니다. 안식일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20:10-11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오늘의 말씀을 준비 하면서 저는 안식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질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입장에서가 아닌 이스라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최초의 태양력은 기원 4241년에 이집트, 성경이 말하는 애굽에서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가 7일이던 혹은 10 이던 매일 같은 일을 해야 하는 노예들에게는 라는 개념은 하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6일을 일하고 하루를 쉬도록 하신 것은 분명히 축복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6 동안 열심히 일하고 주일 하루를 쉬는데, 그것이 축복 아닌가요?

데이트를 하는 젊은 커플이 6 동안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살고 주말에 만날 , 마음이 얼마나 애틋할까요?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것을 기대 하고 계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6 동안 열심히 살고, 거룩한 주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할 , 우리가 말하는 은혜 가득한 예배가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외에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형상화 해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함부로 이용하려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쉼의 , 안식일에 하나님을 만나고 주신 안식 누리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축복 받은, 축복 받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가짜는 버리십시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정말 원한다면, 첫번째 계명은 반드시 기억해야 말씀입니다. “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말라.”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주인을 섬길 없다고 말씀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을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 비교 되는 다른 신은 누구입니까? “재물입니다. 우리는 재물을 신이라고 생각해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심코 하는 속에서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있어!”라고 말하곤 합니다. 마치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돈이 가지기라도 것처럼 느껴지는 말입니다. 심지어 이런 말을 들으면서, “그럼 아니야! 사실이 그렇잖아!”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보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부분은, “재물이 하나님과 동급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같은 부귀 영화를 위한 신앙생활을 하고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도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것을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난 장면에서 찾아 보기 원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렸고 많은 고기를 잡은 , 예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말씀 하십니다. 베드로는 말씀을 듣고 이렇게 행동합니다.  

 

4: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5: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저는 여기서 관심을 두고 있는 단어가 있는데, “버려 두고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결단을 필요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선택하기로 결단을 했다면, 우린 하나님 이외의 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재물을 섬기는 자가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의 것을 버리고 포기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대신 저는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삶의 최우선 순위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여러분은 구절을 가지고 설교를 한다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교회에 헌금 많이 해라! 맞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의미로 말씀이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목회자만 타락 해서 말씀이 그렇게 들여지는 것입니까? 우리의 관심이 너무 세속적으로 바뀌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말씀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우리가 사모할 자가 하나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관심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어아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입니다.

 

11: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원하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외에 나를 위한 신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외에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루 쉼을 줄터이니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서 저는 다른 깨달음을 전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 하는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외의 것을 버릴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늘의 것을 세상의 보다 귀하게 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소원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버릴 있는 용기 있는 성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 그래서 위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라고 소리칠 , 하나님이 우리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귀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posted by no turning back
2021. 12. 13. 10:49 성경이야기/구약

https://www.youtube.com/watch?v=iIo5uojNtog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 삶의 목표는 과연 무엇일까요?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속에서, 경우엔 제가 생각하고 원했던 것보다 훨씬 자주, 우리가 원하지 않는 상황을 마주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정 속에서 저는 최선을 다해 순종하려 했고, 하나님이 제게 주신 뜻을 이루기 위해 나름대로의 최선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과가 제가 원하던 결과가 아닐 때마다 실망하고 낙심하고 했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뜻이라 믿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는지를 없이 고민 했습니다.

저와 같은 경험을 본적 있으신가요?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될줄 알았는데 바라고 원하고 기도하던 결과가 주어지지 않아서 고민 보신적 있으신가요? 처럼?

제가 출애굽기를 통해 이스라엘의 여정을 살피면서 많은 순간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속에서 삶과 동일한 고민의 흔적을 이스라엘에게서 보면서 힘을 얻기도 하고, 더욱 실망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 하면서, 마음에 가장 많이 부르게 되었던 찬송은 안이숙 사모님이 가사를 쓰신 내일일은 몰라요!” 였습니다. “내일일은 몰라요. 장래일도 몰라요…. 평탄한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과연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리고 저를 그런 길로 인도 하실까요?

오늘 이스라엘의 모습을 본문에서 다시 찾아봅니다.

 

[ 19:1- 19: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 16:1- 16: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여기서 우선 우리가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지 90, 3개월 정도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광야에 도착 했던 시간을 기준으로 45일이 지난 시점입니다.  

 

애굽 군대를 수장 시켰던 홍해를 건넌 시점에서 보면, 후에 마라에 도착 해서 쓴물을 단물로 바꾸는 일을 경험 했습니다. 엘림을 거쳐 엘림과 시내산 중간쯤에 있는 신광야에서 먹을 것으로 원망하다가 만나와 메추라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시 신광야를 떠나 하나님이 인도하신 르비딤에 도착 했을 , 물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경험 합니다. 그리고 ,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 모세는 산에서 폰을 들어 기도하고 여호수아는 백성을 이끌고 나가 전쟁을 하게 되고 이기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이스라엘이 도착한 곳은 시내 광야였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이런 저런 말씀을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결론처럼 말씀 하십니다.

 

[ 20:1- 20:2]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저는 오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바람은 무었이었을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무엇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지를 분명하게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여호와 이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 12:2-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리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와서 가나안으로 향할 ,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 7:7- 7:8]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있었던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다만 이스라엘을 사랑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우리가 생각해 봐야 것은, 하나님이 출애굽의 과정에서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보면 됩니다.

홍해를 건너게 주셨습니다. 마라에서 물이 마땅치 않을 , 물의 문제를 해결 주셨습니다. 신광야에서 먹을 것으로 말미암은 불평 가운데서도 음식 문제를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서 해결해 주셨고, 르비딤에서 물이 없다고 때에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 해주셨습니다. 이어지는 아말렉과의 전투에서도 하나님은 직접 싸우시며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시금 말씀하시는 것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는 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언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요한복음 3:16 나카나 있습니다.

 

[ 3:16-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다고 말합니다.

 

[ 2:20-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버리신 증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두번째, 아말렉은 불신자를 의미합니다.

 

성경 속에서 아말렉은 끊임 없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아말렉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것입니다. 아말렉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그토록 집요하게 공격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25:17-18

17.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아말렉의 특징은 마디로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함에 주저함이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책임도 있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이스라엘 자신이 믿지 않았고,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항상 스스로 이스라엘에게 너의 여호와임을 알리시려 하셨습니다.

 

16: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신들이 경험하는 기적의 부분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같습니다. 이로 인해 아말렉은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기에 더욱 이스라엘을 쉽게 공격하게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말을 믿음이 없는이란 의미로 말씀을 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부분을 조금 생각하던 , 몇가지 마음에 깨달음을 얻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가끔은 교회 안에서 있어서는 안되는 상황을 겪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오래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시는 분들 중에도 그런 상황을 만드시는 것을 봅니다. 물론 목회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누구를 탓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들,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 없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믿음이 없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함부로 교회 안에서 행하는 일들로 말미암아  오늘의 교회들은 불신자들의 동네북으로 전락해 버린것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아말렉 우리 주변에도, 교회 안에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것은, 하나님이 아말렉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 하시는가?하는 것입니다.

 

천하에 기억도 못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1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대대로 싸우겠다고 하십니다.

 

17:16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여기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은, 아말렉은 하나님이 멸하셔서 기억도 못하게 하겠다. 그리고 대대로 싸우시겠다고 합니다. 이는 다시말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들 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불신앙 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이스라엘도 처음부터 하나님을 두려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4:10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

 

구절을 보면서 다시금 생각 보는 것은, 아말렉의 공격은 이스라엘을 멸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 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훈련의 과정으로 만드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닫게 되는 것은, 처음부터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이 두려운 분임을 조금씩 배우고 가르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삶은 우리에게 오히려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34: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11:5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145:19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솔로몬은 지혜서인 잠언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우리가 삶에서 경험할 있는 아말렉의 공격은 우리가 힘든 순간일 있습니다. 겨우 한숨 돌린 순간일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 해야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여전히 지키시고 도우시며, 우리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로 고백 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이 제게 더욱 힘이 되는 이유는 여전히 이스라엘은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라 고백하는 수준으로 믿음이 자라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인 전쟁터에 서서 불신자 아말렉을 만나 사움을 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의 군사들에게 오느 ㄹ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너의 여호와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위해 사우리니 너는 나를 믿으라! 지금이 사탄이 기다리던 내가 약해지는 순간이라고 해도 반드시 하나님은 싸움에 나를 위해 승리하게 하심을 믿고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불신앙 싸워 이기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르비딤에 진을 이스라엘을 공격한 아말렉이 과연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일까요? 처음에도 말씀 드렸지만, 이스라엘은 현재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르비딤에 진을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한 것입닏. 그런데 아말렉이 찰나에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주는 말씀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말렉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는 사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말렉과의 싸움은 보기에는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싸움이 맞습니다. 하지만, 싸움에서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고 계심을 보게 하십니다.

오늘 성경으로 돌아가서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는 부분입니다.

 

17: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재미난 것은 여호수아의 반응입니다. 모세가 너는 나가서 싸워라 나는 산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올라가 서리라! 했으면, 여호수아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어떻게요?”라고 물을법한데 여호수아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여호수아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7: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저는 구절을 보면서, 과연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을 들으면서 무엇을 생각 했을까? 하는 생각을 보았습니다. 게다가 여호수아가 백성들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말하는 겁니다.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야 한다. 싸움에 나갈 사람은 알아서 자원해 주기 바란다.” , 선뜻 나갈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요?

이스라엘은 250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그들이 마음이 수동적으로 바뀐 사람들이었습니다. 소극적입니다. 싸움이라곤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었슴니다. 수중에는 무기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가서 싸우라니요? 하지만, 여호수아는 아무말 없이 순종합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깁니다.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집니다. 올린 손이 피곤해서 내려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피곤해도 손을 내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밀리기 때문입니다. , 모세가 손을 들고 있을 있도록 돕는 아론 등장합니다. 그리고 손을 받쳐줌으로 아말렉을 물리치게 됩니다.

 

솔로몬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아말렉과의 싸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을 향한 한가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을 , 하나님의 싸움을 감당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고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피곤해서 팔이 내려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 돕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혼자할 있는 기도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하는 기도가 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기도 하는 자에게 힘을 북돋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아말렉을 물리친 순간. 여기에 마지막 점을 찍습니다.

 

17: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싸움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점을 여호수아가 찍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이 승리의 기쁨을 가져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우리 앞에 닥친 어려움을 놓고 기도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응답을 맏고 문제가 해결 되었을 , 마치 우리가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마음 뿌듯한 승리를 만끽하는 것과 마찬가지인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움은 항상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즐거움은 이스라엘이 기쁨이 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32장에 보면, 사람이 밤이 새도록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 이사람은 하나님의 사자에게 이런 말을 듣습니다.

 

32:26-27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사람의 이름은 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삶에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순간에 그는 인간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에게 매달립니다. 씨름하다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응답을 받습닙다.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유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능히 이길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진 자에게 져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생각이 머무는 자리는 싸움은 하나님이 하시고 승리는 내것으로 남겨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말씀 정리합니다.

믿음이 흔들릴 , 속에 주어진 현실로 인해 불평이 생겨날 , 욕심으로 하나님의 뜻하심이 불편할 , 아말렉과 같이 하나님을 무서워 하지 않는 자들이 공격해 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 아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현실을 앞세워 나를 공격하는 때에 하나님이 나에게 알게 하시는 것은 믿음으로 이기는 것이 승리임을 말씀 하십니다.

우리의 싸움은 칼로 싸유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싸워주십니다. 우리는 칼을 들고 하나님의 승리를 나의 승리라고 하며 하나님게 영광돌리고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여러분!

나의 연약함을 큼타 현실을 가장한 사탄,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악의 공격에 믿음으로 맞서고, 하나님이 대신 싸워 승리함을 믿고 오늘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승리의 잔치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그리고 속에서 감사와 기쁨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축복합니다.  

 

 

posted by no turning back
2021. 12. 13. 10:47 성경이야기/구약

https://www.youtube.com/watch?v=eG3ibZ64PU4

 

여러분들은 가장 힘들고 절망 스러운 때가 언제 였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련이 끊임없이 다가올 , 가장 힘들고 어려워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사역을 하면서 여러 힘든 상황을 겪었지만, 가장 위기라고 느껶던 때는 2004년도 전교인 수양회를 갔을 였던 같습니다. 당시 LA에서 너무도 힘든 사역을 하고 있었던 터라, 내쉬빌의 사역은 사역의 마지막이 것이라 생각하며 2003 내쉬빌로 와서 사역하던 때였습니다. 한창 교회가 부흥하던 2004, 플로리다로 전교인 수련회를  가게 되었는데, 가정을 제외하곤 모든 성도들이 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하루를 아껴 보겠다고 금요일 밤에 떠나 토요일 아침에 도착 했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했습니다. 여선교회원들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수영장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 갑자기 웅성거리며 분이 뛰어와 학생 하나가 수영장 바닷으로 가라 앉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911 연락을 하고 앰블런스가 오는 동안 성도님 분이 침착하게 CPR, 심폐소생술을 해서 병원으로 옮겼는데 상태가 심각해서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원까지는 수련회 장소에서 1시간 떨어져 있었는데, 부모는 차로 이동을 하고, 학생은 헬리콥터로 이동해야 했던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 함께 수련회에 참석했던 저와 성도들 일부는 금식하고 기도 했으며, 수련회의 많은 시간을 전교인이 학생을 살려 주십사 매어달리며 기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행히 학생은 회복했고, 문제는 없었지만, 당시 저는 무기력함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던 같습니다. 이후, 제겐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역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사역을 쉬는 현재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적으로는 절망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역을 내려놓은지 7년이 되어가는 현재 다시금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으로 돌아가고 있는 같습니다.

삶은 누구나 절망의 순간을 맞이하고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은 언제 절망하며 무엇이 여러분을 절망하게 하느냐?입니다. 그리고 절망을 통해 여러분은 무엇을 알게 깨닫고, 배우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 출애굽기 17:8-16 우리가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물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 하다가 물을 얻고나서 한숨 돌리는 순간 아말렉 공격해 옵니다. , 여호수아는 칼을 들고 백성들과 함께 아말렉을 대항하며 싸우고, 모세는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지팡이와 손을 듭니다.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이 내려가면 이스라엘이 집니다. 아론과 훌이 이것을 알고 모세의 손을 지탱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쟁의 결과에 대해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1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이려고 하시는 지를 찾아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함께 듣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사탄은 우리의 약함을 틈타 공격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서 봅니다

 

17: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여기서 보면, “ 때에 아말렉이 와서라고 기독하고 있음을 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 어떤 때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르비딤에 장막을 쳤던, 그러나 물이 없는 장막을 때였습니다.

 

17: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본래는 물이 있어야 하는 곳인데,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장막을 쳤음에도 물이 없는 때에, 물이없는 곳에 장막을 상황이었습니다. 순종의 결과가 막막한 순간이었습니다. 짐작컨대, 르비딤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지 않았거나, 르비딤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인도 하심을 믿고 따라 왔지만 정작 아말렉의 공격을 받았던 ,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여호와로 믿지 못하던 그런 때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말씀을 떠올려보면, “ 물이 없어 불평하던 입니다. 광야에서 가장 필요한 물이 없다는 것은 죽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단순히 물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불평하던 입니다.

 

17: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순간, 4 말씀을 보면, 모세 역시 죽음에 이를수 있다는 공포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 이스라엘도 광야에서 죽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었지만, 모세도 죽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던 순간이었습니다.

 

17: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아시겠지만, 이스라엘에게 돌에 맞아 죽는다 의미는 죄에 대한 징벌과 수치스러운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물이 없어서 이스라엘의 인도자인 모세가 그런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시험 하던 였습니다.

 

17: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인도 하셨음에도 광야생활에 가장 필요한 물이 없어서 불평이 극에 달한 ”, 뿐만 아니라 감히 하나님을 시험하는 불순함이 있던 였습니다. 순간에 아말렉이 쳐들어 것입니다. 아직 지도자를 믿고 따르기엔 거리감이 있고, 지금 가고있는 광야 길에 대한 정보도 없는 ,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핸 절대 믿음도 없던 ”, 아말렉이 공격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오늘 우리 속에서도 존재하는 같습니다. 나름대로는 하나님의 듯에 순종하며 최선의 길이라고 해서 가는 , 그런데 가다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 그래서 실망하며 하나님께 원망하고 있는 나의 모습. 심지어 하나님에게 기도 한다고 무릎 꿇지만 원망하듯 한마디 던지며 하나님이 어쩌면 이럴 있느냐고 하나님을 시험 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말렉에게 공격당하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보았습니다. “ 이스라엘에게도 아말렉에게도 모두 중요한 때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같은 지금 중요한 때입니다. 그래서 사탄도 우리를 최선을 다해 공격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먼저 겪었던 사도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런 경고를 줍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일단 먼저 우리가 알아야 것은, 사탄이 삼킬자를 찾는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대적하는 방법을 두가지로 말씀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근신한다 말은 헬라어 nhvfw라는 말로, 술 취하지 않다, 신중하다 뜻입니다. 또한 깨어라 말은 헬라어의 grhgoreuvw라는 말로 문자적으로는 정신차리다. 경계하다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제자들과 함께 가셔서 기도 하실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베드로 누구보다 깨어있지 못한 대가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 ”, 준비 되지 않은 ”, 불평이 넘치는 ”,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있는 사탄의 공격받기 가장 쉬운 순간이다. 조심해라! 근신해라! 깨어 있어라!

 

지금 힘든 삶으로 인해 하나님께 불평하며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혹은 너무 평탄해서 느슨해진 신앙생활 하는 분이 계십니까? 사탄이 공격하려 함을 깨달으시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 기도하며 말씀으로 준비하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번째, 아말렉은 불신자를 의미합니다.

 

성경 속에서 아말렉은 끊임 없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아말렉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것입니다. 아말렉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그토록 집요하게 공격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25:17-18

17.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18.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아말렉의 특징은 마디로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함에 주저함이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이스라엘의 책임도 있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이스라엘 자신이 믿지 않았고,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항상 스스로 이스라엘에게 너의 여호와임을 알리시려 하셨습니다.

 

16: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신들이 경험하는 기적의 부분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같습니다. 이로 인해 아말렉은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기에 더욱 이스라엘을 쉽게 공격하게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말을 믿음이 없는이란 의미로 말씀을 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부분을 조금 생각하던 , 몇가지 마음에 깨달음을 얻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가끔은 교회 안에서 있어서는 안되는 상황을 겪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오래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시는 분들 중에도 그런 상황을 만드시는 것을 봅니다. 물론 목회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누구를 탓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들,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 없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믿음이 없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함부로 교회 안에서 행하는 일들로 말미암아  오늘의 교회들은 불신자들의 동네북으로 전락해 버린것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아말렉 우리 주변에도, 교회 안에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것은, 하나님이 아말렉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 하시는가?하는 것입니다.

 

천하에 기억도 못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1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대대로 싸우겠다고 하십니다.

 

17:16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여기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은, 아말렉은 하나님이 멸하셔서 기억도 못하게 하겠다. 그리고 대대로 싸우시겠다고 합니다. 이는 다시말해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자들 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불신앙 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이스라엘도 처음부터 하나님을 두려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4:10

네가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에게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 하시매

 

구절을 보면서 다시금 생각 보는 것은, 아말렉의 공격은 이스라엘을 멸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 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훈련의 과정으로 만드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닫게 되는 것은, 처음부터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이 두려운 분임을 조금씩 배우고 가르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삶은 우리에게 오히려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34: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11:5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145:19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솔로몬은 지혜서인 잠언에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에 대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우리가 삶에서 경험할 있는 아말렉의 공격은 우리가 힘든 순간일 있습니다. 겨우 한숨 돌린 순간일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 해야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여전히 지키시고 도우시며, 우리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로 고백 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이 제게 더욱 힘이 되는 이유는 여전히 이스라엘은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라 고백하는 수준으로 믿음이 자라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인 전쟁터에 서서 불신자 아말렉을 만나 사움을 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의 군사들에게 오느 ㄹ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너의 여호와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위해 사우리니 너는 나를 믿으라! 지금이 사탄이 기다리던 내가 약해지는 순간이라고 해도 반드시 하나님은 싸움에 나를 위해 승리하게 하심을 믿고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불신앙 싸워 이기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르비딤에 진을 이스라엘을 공격한 아말렉이 과연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일까요? 처음에도 말씀 드렸지만, 이스라엘은 현재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르비딤에 진을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한 것입닏. 그런데 아말렉이 찰나에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주는 말씀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말렉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는 사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말렉과의 싸움은 보기에는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싸움이 맞습니다. 하지만, 싸움에서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고 계심을 보게 하십니다.

오늘 성경으로 돌아가서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령하는 부분입니다.

 

17: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재미난 것은 여호수아의 반응입니다. 모세가 너는 나가서 싸워라 나는 산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올라가 서리라! 했으면, 여호수아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어떻게요?”라고 물을법한데 여호수아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여호수아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7: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저는 구절을 보면서, 과연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을 들으면서 무엇을 생각 했을까? 하는 생각을 보았습니다. 게다가 여호수아가 백성들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말하는 겁니다.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야 한다. 싸움에 나갈 사람은 알아서 자원해 주기 바란다.” , 선뜻 나갈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요?

이스라엘은 250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그들이 마음이 수동적으로 바뀐 사람들이었습니다. 소극적입니다. 싸움이라곤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었슴니다. 수중에는 무기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가서 싸우라니요? 하지만, 여호수아는 아무말 없이 순종합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깁니다.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집니다. 올린 손이 피곤해서 내려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피곤해도 손을 내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밀리기 때문입니다. , 모세가 손을 들고 있을 있도록 돕는 아론 등장합니다. 그리고 손을 받쳐줌으로 아말렉을 물리치게 됩니다.

 

솔로몬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아말렉과의 싸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을 향한 한가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을 , 하나님의 싸움을 감당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고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피곤해서 팔이 내려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 돕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혼자할 있는 기도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하는 기도가 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기도 하는 자에게 힘을 북돋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아말렉을 물리친 순간. 여기에 마지막 점을 찍습니다.

 

17: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싸움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점을 여호수아가 찍게 하심으로, 이스라엘이 승리의 기쁨을 가져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우리 앞에 닥친 어려움을 놓고 기도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응답을 맏고 문제가 해결 되었을 , 마치 우리가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마음 뿌듯한 승리를 만끽하는 것과 마찬가지인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움은 항상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즐거움은 이스라엘이 기쁨이 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32장에 보면, 사람이 밤이 새도록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 이사람은 하나님의 사자에게 이런 말을 듣습니다.

 

32:26-27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사람의 이름은 야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삶에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순간에 그는 인간적인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에게 매달립니다. 씨름하다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응답을 받습닙다.

 

32:28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유일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두에게 능히 이길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진 자에게 져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생각이 머무는 자리는 싸움은 하나님이 하시고 승리는 내것으로 남겨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말씀 정리합니다.

믿음이 흔들릴 , 속에 주어진 현실로 인해 불평이 생겨날 , 욕심으로 하나님의 뜻하심이 불편할 , 아말렉과 같이 하나님을 무서워 하지 않는 자들이 공격해 옵니다. 하나님을 무서워 아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현실을 앞세워 나를 공격하는 때에 하나님이 나에게 알게 하시는 것은 믿음으로 이기는 것이 승리임을 말씀 하십니다.

우리의 싸움은 칼로 싸유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싸워주십니다. 우리는 칼을 들고 하나님의 승리를 나의 승리라고 하며 하나님게 영광돌리고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여러분!

나의 연약함을 큼타 현실을 가장한 사탄,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악의 공격에 믿음으로 맞서고, 하나님이 대신 싸워 승리함을 믿고 오늘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승리의 잔치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그리고 속에서 감사와 기쁨을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축복합니다.  

posted by no turning back
2021. 12. 13. 10:44 성경이야기/구약

https://youtu.be/B25zMJwm_Yk

 

아브람 아브라함”, “사래 사라”. “루스 벧엘이들의 차이를 아시는가요? , 같은 사람 다른 이름, 같은 자리 다른 이름입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에는 같은 사람 혹은 같은 자리에 하나님이 세로이 붙여주신 다른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물론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음 또한 아실 것으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7절만 읽었지만, 1절부터 7절까지가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1절에 보면,

 

17: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말씀이 시작하는 부분에서 지명이 등장 하는데 르비딤이라고 불려지는 곳입니다. “르비딤이란 이름의 뜻은, “쉬는 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물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쉴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이 시작 되고 모든 상황이 정리 이후에 하나님은 그곳을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게 하십니다. 바로 맛사 혹은 므리바라는 이름입니다.

 

17: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새로운 이름, “맛사라는 이름의 뜻은 시험하다, 유혹하다 뜻입니다. 동시에 므리바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뜻은 싸우다, 꾸짖다 의미입니다.

원래 쉬는 곳의 의미를 가진 자리가 시험하는 자리, 싸움의 자리로 바뀐 이유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말씀 가운데 지명이 바뀐 것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첫째로, 불평(불신)이 르비딤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서 봅니다

 

17:2-3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제가 지난 주에도 말씀을 전하면서 불평은 있는데 기도가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서 이런 생각을 봅니다. 저들은 마라의 물을 경험 했는데도 여전히 물이 없음에 대해 불평하고 있는 것일까? 더직접적으로 말씀 드리면 저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 했으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일하심 혹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기서 믿음 다시 정리 보기 원합니다. 믿음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구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두가지 기준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믿어야 하고,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심을 빋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말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구절을 기억 하실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여기서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하나님임을 설명 하면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미는 스스로 있는 하나님의 존재 이야기합니다. 믿음은 나의 하나님 되신 여호와를 인정 하는가?에서 시작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항상 시작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를 찾아 오셔서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인정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긴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무엇일까요? 물론 세상에서의 복을 이야기 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문자적인 해석을 보면 보상이라는 말도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엇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이런 믿음을 머리 속에 두고, 오늘의 사건으로 돌아가서 보면, 이스라엘은 과연 무엇때문에 지금 불평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들은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 했습니다. 먹을 없는 물을 먹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 했습니다. 먹을 것으로 불평 , 고기와 만나로 먹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경험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정도 되면 물이 없어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공급해 주실 것을 있을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불평 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가진 지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봅니다.

 

르비딤은 쉬는 이란 이름이 말해 주듯 당시 광야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겨울에는 비가 오지 않아 물이 없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겨울에는 사람들이 지나지 않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학자들의 견해로는 이스라엘이 도착한 시기가 겨울이어서 그곳에 물이 없었던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자연 현상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어쩔 없는 상황입니다. 상황에서 불평을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 있습니다. 하지만, 불평에 반드시 함께 했어야 하는 것은 기도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분노 했습니다. 그에 대해 모세는 위기감을 느끼고 하나님에게 이렇게 간구합니다.

 

17: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제가 여기서 보고 있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해도 믿지 못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기적으로만 맏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지나간 시간에 내게 행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적 문제 앞에서 불평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계속 반복해서 말씀 드리지만, 우리는 하나님에게 불평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불평을 들으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불평을 들어 주시는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실 방법 또한 알고,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순간에 우리가 보일 믿음은, 하나님이 해결 주시지 않아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능력이 있으신데 나를 위해 행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럼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께 물으며 고민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같습니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이 있는 성도라고 하면, 여기서 멈추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하시는 일을 믿고 기대 필요가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나의 문제를 해결 주시지 않아도 여전히 하나님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무릎 꿇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풀병으로 끝나는 신앙인이 되지 말고 불평을 넘어서 믿음의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군사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번째, 불평의 이유는 불신입니다

 

이스라엘의 불평은 모세를 향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7:2 후반절입니다.

 

17:2b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저들은 모세에게 불평을 하는 모양을 하고 있지만, 불평이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란 것을 모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불평은 불평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믿어야 하는 대상입니다. 우리가 불평하기 보다 경배해야 대상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믿음을 하나님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경외(두려움)” 대상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 하면, 항상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리려던 장면을 이야기 합니다. 곳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서 찾은 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이었습니다.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구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서 경외라고 하는 단어가 영어성경에서 보면 “fear,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을 이전에도 말씀 드린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시험하기까지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는 종종 우리가 시험 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밖에 없는 현실을 직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하면 우리가 직면한 현실적 어려움은, 현실에서 경험하는 시험같은 것들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말로 이런 상황을 해석 있겠지만, 저는 그것을 단련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욥기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원래 단련이란 말은 철공소에서 사용되던 말입니다. 불에 쇳덩이를 넣고 빼서 망치로 치고 다시 불에 넣고 망치로 때리고 찬물에 넣고 다시 불에 넣고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각종의 값비싼 물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물이 없는 어려움은 현실적으로 민감할 있는 그런 어려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능력에 의지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 하는 것이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에게 간구하며 하나님을 믿으면 문제도 해결 되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인정 받는 이스라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부분에서 이런 생각을 다시금 보았습니다. 현실문제가 하나님 보다 크게 보이는 것일까? 현실 앞에서면 나는 하나님을 보지 못할까? 아니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까?

현실은 손가락 같아서 눈을 막고 있는 손가락이 태양을 가리듯, 우리의 현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있음을 인정 합니다. 뿐만아니라 아기가 엄마가 함께 있을 안전하다고 여기다가 잠에서 깨어 엄마가 보이지 않을 , 가져지는 두려움으로 울게 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삶의 순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 때에 두려움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불평이 터져 나올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모든 것의 이유는 역시 하나님을 믿지 못함에서 오는  불신입니다.

 

제가 사역으로 부름 받았을 , 제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역이 힘들 때마다 말씀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현실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역을 하지 못하게 됨에 대해 불평이 식지 않을 , 하나님이 코로나 사태를 통해 인터넷 설교를 하면서 나름대로 숨을 되었습니다. 처음 계획을 세운 것이 10년도 넘었는데, 하지 못하고 게으름을 부리다가 10년이 지나 현실 앞에서 할수 있도록 인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다음의 구절을 보게 하셨습니다.

 

43:2-3a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제가 말씀을 제게 새로이 주셨다고 하는 이유는 가운데로 지날 ”, “강을 건널 ”, “불가운데로 지날 우리 인생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삶에 현실로 닥쳐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이 나를 흔드시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쓰러져서 삶을 포기하려는 나에게, “정신차려! 나를 , 너의 하나님 여호와야!”라고 나를 흔들어 깨우시는 하나님을 만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된 여러분!

지금 나의 현실이 불평할 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해도, 그래서 불평할 밖에 없어도, 여전히 함께 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기억하는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정신차려! 나를 , 너의 하나님 여호와야!”

 

 

마지막으로, 불평(불신)을 해결해 주신 이유, 그리스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유있는 불평을 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 합니다.

 

17:6-5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모세는 하나님에게 명령을 받고 그대로 행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장소가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출애굽의 사명을 받은 자리입니다. 곳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 정해서 반석에서 물이 나올 것을 말씀 하십니다. 대신 증인이 있어야 하겠기에 장로들을 모셨습니다. 사용하는 도구로는 모세가 출애굽사역을 시작될 때부터 사용 했던 지팡이입니다. 지팡이에 대해서 성경 곳만 보면,

 

4: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4:2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지금 모세가 가지고있는 지창이는 모세의 지팡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쓰시는 하나님의 지팡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심으로 일하신다는 것과 쓰실 도구는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방법적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직접 결정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관심있게 보는 것은 반석입니다. 위에 있는 많은 반석 중에 굳이 반석을 정하시고 반석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정확하게 반석위에 것입니다.

여기서 반석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지난 , “마라의 던져졌던 나무가 그리스도의 사징적 의미 였듯이 오늘 반석 역시 우리에게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예수님은 요한복음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말씀들을 통해 우리가 분명하게 보는 것은, 반석은 예수님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물은 예수님이 허락하신 생명의 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적 갈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요한복음 4장에도 보면,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이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오늘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이 아닐까요? 광야의 삶을 감당하게 하는 , 우리의 생명을 연장 시키는 . 물이,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공급됨을 오늘 출애굽 광야에서 우리에게 예시 되고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갈증으로 불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계시록에도 목마른 자들에게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시는데,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이사야서와 계시록 에서 공히 말씀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물로 나오라고 하시면서 두가지를 말합니다. 가지는 물마시기 위해 아무것도 필요없다.” 것입니다. 다른 가지는 와야한다 것입니다. 대가를 치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물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일은 앞으로 나가는 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저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현실의 막막함은 우리를 불평하게 합니다. 그리고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이같은 막막함 혹은 정말감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환경입니다. 이런 일들이 있을 ,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첫번째는 불평은 쉬는 이라는 뜻의 르비딤 시험하다, 유혹하다라는 뜻의 맛사”, 그리고 꾸짖다, 다투다 의미의 므리바 이름이 바뀌듯, 불평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짓게 합니다. 그리고 충분히 이유있는 현실의 막막함에서 시작된 불평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평하며 주저앉는 우리에게 정신차려! 나를 , 너의 하나님 여호와야!”라고 하는 말을 들음으로 불신에서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의 막막함을 해결해 주시기도 하지만, 반석의 물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로 통해서 현실에 머무르지 말고 영생을 얻으라고 하시는 것이라 깨닫게 되었습니다.

 

현실을 통해 주어지는 불평, 이것은 우리가 믿음을 되찾을 있는 기회이며, 그리스도를 만날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된 여러분!

유혹하고 넘어뜨리며, 우미 가득한 세상의 현실이 나를 막는다해도, 불평하며 믿음 없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자가 되지말고, 절망의 순간에 우릴 일으키시는 반석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이 공급해 주시는 생명수를 통해 광야같은 현실을 이기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 백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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