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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부터 말씀을 전하는데 그 내용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잡히시던 순간까지 사람들에게 비유를 5가지를 말씀 하셨는데, 그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죽는 순간까지 우리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 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지난 주의 말씀에서는 두 사람이 등장을 하는데, 한 사람은 예라고 대답하고 행하지 않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아니오라고 말하고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중에 누가 하나님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인가?하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비유의 말씀으로, 비유의 내용을 살펴보면, 포두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기고 먼길을 떠나면서 수확의 때에 일정한 수익을 주인에게 주기로 합니다. 하지만, 악한 농부들의 행동으로 인해 주인이 보낸 종들 뿐 아니라 주인의 아들까지 죽입니다. 그 결과 주인이 이 포도원을 새로운 사람에게 주신다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포도원의 주인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포도원을 맡아서 경작 하던 농부들입니다. 세번째 사람은 소득을 얻으려 포도원에 갔던 종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아들입니다.
사실 이 비유는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는 비유입니다. 당시에는 큰 토지를 소유한 지주(Landlord)와 그 지주가 타국에 가고 없을 때에 소작인으로서 그 토지를 경작하였으나, 포도원을 맡아서 일하나 그 토지의 소유권이 인정받지 못하게 된 농부 사이에 가졌던 불가피한 긴장을 말해주고 있는, 1세기 당시의 유대 나라 갈릴리의 사회적 배경을 반영하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판단비유(judgment parables)로서 일반율에 해당됩니다. 다시 말하여 청중들이 듣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도록 요구하는 실제적 삶의 정황에 대한 적극적인 제시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 하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왜 마지막 한 주간의 삶 속에서 얼마든지 좋은 이야기들을 해 주실 수 있으셨을텐데 이런 이야기를 하신 것일까요?
저는 오늘 모습 속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우리의 본성, 그리고 하나님의 본성을 함께 생각 하며 깨닫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첫째로, 사람은 죄의 본성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람은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시작된 죄의 본성(Sinful nature)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원소와(element)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5장에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것이 더러운 것이 많다고 말씀 하시면서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마 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For out of the heart come evil thoughts, murder, adultery, sexual immorality, theft, false testimony, slander.
사도 바울은 우리 속에 있는 죄가 무엇인지를 더 많이 이야기 합니다. 이 내용은 성경을 한 번 찾아 봅시다.
롬 1:29-32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They have become filled with every kind of wickedness, evil, greed and depravity. They are full of envy, murder, strife, deceit and malice. They are gossips, slanderers, God-haters, insolent, arrogant and boastful; they invent ways of doing evil; they disobey their parents; they are senseless, faithless, heartless, ruthless. Although they know God's righteous decree that those who do such things deserve death, they not only continue to do these very things but also approve of those who practice them.
그래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사람을 대할 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믿을 것인가? 믿어 줄 것인가?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같이 하고 우리의 기대야
할 분은 하나님임을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힘들게 해도 아프게 해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은 누구나 다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똑같습니다. 죄인입니다. 죄를 가지고 삽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가 말씀 하시려고 하는 두 번째는 하나님이 계산 하시려고 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세상은 혹은 내 삶은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금년에 끝날지 혹은 끝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삶에 끝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런 저런 것을 가지고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은 끝이 있는데 그 끝은 우리가 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떤 농부가 풍년을 맞아 많은 것을 거두고 재산의 많은 것으로 인해 행복해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But God said to him, 'You fool! This very night your life will be demanded from you. Then who will get what you have prepared for yourself?'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끝이 있다는 것을 말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제게 깨닫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세상의 욕심을 갖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인간의 욕심의 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에 농부들은 추수한 것을 주지 않으려고 심부름 온 하인들을 죽이던 농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아들을 보내자 농부들의 마음이 변합니다. 어떻게 변합니까?
막 12: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But the tenants said to one another, 'This is the heir. Come, let's kill him, and the inheritance will be ours.'
이제는 수확뿐 아니라 아예 포도원을 갖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질문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 21:41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He will bring those wretches to a wretched end," they replied, "and he will rent the vineyard to other tenants, who will give him his share of the crop at harvest time."
반드시 우리 삶에 끝은 있습니다. 죄를 지은 자에게는 진멸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단순히 우리가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우리가 죄인이고 죄를 짓고, 그렇게 살고 인생에 끝이 있고 죄를 지었기에 벌을 받고 하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자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봅시다.
먼저 주인은 때가 되었을 때에 한 종을 보냅니다. 그리고 농부들은 그 종을 때려서 보냅니다.
막 12: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At harvest time he sent a servant to the tenants to collect from them some of the fruit of the vineyard.
그리고 그 종이 돌아 왔을 때, 주인은 어떻게 합니까?
막 12: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Then he sent another servant to them; they struck this man on the head and treated him shamefully.
그런데 그 종을 또 빈손으로 돌려 보냅니다.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했다고 합니다. 이 때 주인은 어떻게 합니까?
막 12: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He sent still another, and that one they killed. He sent many others; some of them they beat, others they killed.
또 다른 종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 외 많은 종을 보냅니다. 그 중에 죽은 종도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 없이 기회를 주십니다. 돌아서기를 기대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But do not forget this one thing, dear friends: With the Lord a day is like a thousand years, and a thousand years are like a day.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압니까?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The Lord is not slow in keeping his promise, as some understand slowness. He is patient with you, not wanting anyone to perish, but everyone to come to repentance.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 모두가 천국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참고 또 참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 속에 죄가 있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에게 좋은 것을 많이 주어도 우리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다시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끝이 있다. 2012년이 아니어도 우리 삶에는 끝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다운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까지 얼마 남겨놓지 않은 주님이 오늘 말씀을 통해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 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성을 아신다는 것. 우리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 그래서 무서운 말씀을 주시는데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
그러면 이것이 다 일까요? 아닙니다.
막 12: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So they took him and killed him, and threw him out of the vineyard.
여기 8절의 말씀은 이미 이루어진 말처럼 들리지만, 당시 예수님의 상황에서 생각을 해 보면, 할 것이라는 “will come and destroy”라고 하는 말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기회를 얻게 하시기 위해 계속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을 잘 아시는 하나님. 심판이 있다고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시는 하나님. 그 분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래 참고 기다리시면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십자가의 죽음 앞으로 나가면서 우리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고 싶었을까요?
예수님을 죽게 하시면서까지 우리 모두 천국에서 만나자고 하시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가족은 꼭 천국에서 함께 만나는 아름 다운 축복의 가정이 되기를,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기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TEST 1 (0) | 2020.0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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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로 살기 vs.나사로로 살기 (누가복음 16:19-31) (0) | 2015.07.10 |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 하나님(열왕기하 4:38-41)-엘리사(3) (0) | 2014.03.24 |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습니다.(열왕기하 4:25-30)-엘리사(2) (0) | 2014.03.24 |
환난을 넘어서 자유로(열왕기하 4:1-7)-엘리사[1] (0) | 2014.03.16 |
오늘 본문 말씀을 처음 들으시는 분이 계신지요? 천국과 지옥을 설명 하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예수님께서 말씀 해 주신 비유 중 한 말씀입니다.
내용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이름 없는 부자와 이름이 있는 거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이름은 없지만 세상에서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이름은 있지만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거지답게 살았습니다. 세상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정리된 이 예화는 죽어서 천국에 간 이후의 부분을 더 밀도 있게 설명 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들께 가장 상투적인 질문을 한가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부자가 되고 싶습니까? 나사로가 되고 싶습니까? 목사가 이렇게 질문을 하면 여러분은 목사가 원하는 대답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나사로가 되고 싶다”하시는 분들은 손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하는 분들도 손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도 저도 손 안 드신 분들 계십니까? 제가 그 분들을 위해 세 번째 답을 드리겠습니다. “세상에서는 부자로 죽어서는 나사로로 살고 싶다.”
이제 다시 여러분들께 한 번 기회를 더 드리겠습니다. 1번은 부자로 살기, 2번은 나사로로 살기, 3번은 세상에서는 부자로 죽어서는 나사로로 살기 여러분은 몇 번을 원하십니까?
오늘날 미국뿐 아니라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이상한 기독교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로 생각하는 교인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류의 신학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번영신학”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오늘 여러분들이 원하는 그 답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부자 죽어서는 나사로.
이에 대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선택은 하나(There is just one choice)다.
제가 어렸을 때, 금성(LG)의 광고 문구는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오늘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선택을 이야기 하자면, “순간의 선택이 영생과 영 죽음을 좌우 합니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보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19: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청년은 근심 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갑니다. 성경은 이 청년이 예수님에게로 돌아왔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의 선택은 “세상에서의 부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거지 삭개오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 등장 하기도 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삭개오입니다.
성경이 설명하는 삭개오는 이런 사람입니다.
눅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의 직업은 세리였고 그의 재물 수준은 부자였다고 합니다. 재물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삭개오의 선택은 무엇이었습니까?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 삭개오의 선택은 자기 것을 포기 하고 거지가 되기로 작정한 선택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 하시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의 기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십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우리에게 먼저 생각 해 봐야 할 것은 “두 주인”이라는 단어입니다. 즉 선택은 내가 하지만 그 결과로 알 수 있는 것은 “누가 나의 주인인가?”를 답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선택이 우리에게 다시금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선택하는 결과에 따라 나는 누군가의 종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다면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재물을 선택한다면 나는 재물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재물에 대해 잠깐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말로는 “재물”이라고 번역 된 이 “재물”의 원어는 “mamonas”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재물”이 그 의미이지만, 이 단어가 가지는 또 다른 본질적 의미는 “재물의 신”의 개념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혹은 재물을 우리의 신으로 섬기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과 동등한 수준의 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앞에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생각 할 수 있습니까? 아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이 말씀을 잘못 오해 하시면 “헌금을 많이 하라!”는 속된 설교로 이해 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진심으로 제가 여러분들에게 도전 하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는 물질 앞에서 연약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다 나는 물질 앞에서 강하다. 하실 분 있습니까? 요즘 세상에 우리 대부분은 물질 앞에서 무력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아닌 척 하고 살아갑니다.
제가 이렇게 묻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원하는 만큼의 물질이 생긴다면 여러분들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물질로 완전히 100%만족 하실 것 같습니까? 제 생각에는 아마 “조금 더”라고 하는 말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죄성”은 만족이라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는 부자로 천국에 가서는 나사로로 살고 싶다”고 대답 하셨습니다.
이 말이 가지는 가장 정확한 표현은 “내가 물질 앞에서 약합니다.”라는 것 아닐까요?
어쨌든 우리가 정말 신앙을 제대로 가지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기 원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선택은 한가지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던 혹은 물질을 선택하던 그 선택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선택은 몇 가지라고요? 한가지입니다. 기억 하시고 그 한가지 선택-하나님을 바르게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축복 받은 자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선택의 기회는 지금(right now)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선택은 한 가지라고 한다면, 그 기회는 바로 지금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말아야 합니다.
전도를 하다 보면, 어떤 분들은 세상을 사는 동안 마음대로 살다가 마지막에 믿어서 구원 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여러분은 그것이 가능 하다고 생각 하십니까?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제가 약해 보입니까? 건강해 보입니까? 건강해 보이시지요? 그런데 저는 8년전 어느 날, 몸이 좋지 않아서 응급차에 실려 병원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2주간 동안 깨어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그 때 완전히 깨어나지 못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없습니다. 그 후에 저는 삶을 다시 생각 해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돌아가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눅 16:27-28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말씀에서는 부자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물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고 하는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부자가 생각한 것은 자기 가족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나사로를 자신의 집으로 보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가족들이 믿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자가 이렇게 부탁을 하자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눅 16: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에 대해 부자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30절입니다.
눅 16: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화를 마무리합니다.
눅 16: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 합니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는 은혜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건방지게 행동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참으로 기구하게 사역을 해 왔습니다. 교회를 나가달라는 요청을 받아 본 적도 있습니다. 헌금을 돌려 달라고 하는 상황도 경험 해 보았습니다.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묻지요.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어떤 선택이었습니까? 말씀을 따를 것인가? 말것인가?의 선택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베드로에게 주어진 선택의 여지는 몇 가지였습니까? 두 가지였습니다. “따르던가 안 따르던가…” 그런데 그 결정에 많은 시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바로 “지금”
여러분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을 마음의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럼 다음 말씀은 하나님을 믿을 준비가 된 분들에게는 복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다음의 말씀은 재앙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31절의 말씀을 먼저 봅니다.
눅 16: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여기 모세와 선지자는 누구를 말씀 하고 있는 것입니까? 구약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이유는 “복음”을 설명 하시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앞 절 누가복음 16:16절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눅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율법과 선지자”가 내용상으로는 구약을 말하고 있다면, 이 구약은 세례요한에서 끝이 났고, 이어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전파되고 침입한다고 말씀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구약은 필요 없고 신약만 성경이라는 식으로 이해 하시면 안됩니다. 이 말씀은 율법과 은혜에 관한 말씀입니다.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으면 이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바라고 선택해야 함을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것은 아니겠는가?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돌아가서 보면, 당연히 우리는 복음, 하나님의 은혜를 선택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도 지옥에 가기 위해 부자의 삶을 선택할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그런데 복음을 선택하는 시기는 우리가 뒤로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돌아가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 기회를 얻을 수 없다고 말씀 합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믿습니까? 솔직히 대답을 못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다음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부자입니까? 나사로입니까?
나는 부자인가? 거지 나사로인가?
제가 오늘 여러분께 드린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우리가 선택 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그 선택을 나중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가 한가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어떤 선택을 하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부자입니까? 나사로입니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나사로 혹은 나사로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은 “나는 부자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자라고 하는 말은 “prousios”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를 계시록에서는 이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계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이 말씀은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인정 하시기에 부자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단어가 사용 된, 다른 한 곳 더 보겠습니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이 말씀은 스스로 부자라고 하지만, 정작 가난하고 헐 벗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한 사람은 세상적으로 가난한 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상에서는 부자의 모습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난한 부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부자 모양을 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난하게 살아야 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번 가난이 뭔지 생각해 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난이 복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언제요?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런데 물질적으로는 상관 없는 “심령의 가난”을 말씀 합니다. 우리는 종종 “심령”을 마음으로 해석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 하는 “심령”은 “pnumati”, “영”, 성령”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proxos”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는 “거지 나사로”의 “거지”라고 표현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거지가 구걸하듯 성령을 갈망하며 구하는 것을 말하며 이런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말씀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보면, 내가 거지인지 부자인지 알기 알기 위해서는 나에게 성령을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 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내가 왜 혹은 어떤 사람이 성령을 사모 하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로마서 3:20의 말씀입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여기 로마서의 말씀을 보면서 생각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 삶의 기준이 말씀이 되어야 한다.” 혹시 이렇게 생각 하십니까?
그러면 다음의 말씀은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이 의인이라 칭하는 의인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럼 여기서 한 가지 더, 베드로가 물에 빠져가던 장면을 떠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에 빠집니다. 그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여러분도 아시지요?
“믿음이 적은” “oligopiste” 이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쉽사리 믿지 않는…”의 의미입니다. 적은 것이 아니라 잘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에 빠지는 것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우리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행위로도 의인이 될 수 없지만,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인이 되지 못합니다.
앞서 함께 보았던 로마서 3:20의 말씀은 우리가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라는 뜻일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우리는 의롭지 못함을 깨닫게 하시는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우리의 죄성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 하신다고 하면 그 율법을 우리가 다 지키라는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는 울법을 다 지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완성된 율법은 우리에게 법으로서 우리가 자격미달임을 알게 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죄인임을 분명히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서 가난한 자가 될 것이고 은혜를 구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말씀의 주제로 돌아가서 묻습니다. 여러분은 나사로입니까? 아니면 부자입니까?
저는 여러분의 재산이 얼마이든지 상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우리가 가진 재산을 통해 우리가 부자인가 아닌가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 속에 성령을 갈망하는 마음, 나를 믿음에 이르게 하는 성령님의 임재를 갈망함이 나에게 있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과 상관 없이 나는 나사로입니다. 그러나 혹여 내 마음에 성령을 갈구하는 마음이 없다면 내가 가진 것과 상관 없이 나는 부자입니다.
잠깐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부자인지 나사로인지 생각하시면서 오늘의 말씀을 함께 생각 해 보십시오.
선택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입니까? 세상(부요함)입니까?
선택의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선택을 위해 지금 무엇보다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은, “나는 나사로 인가? 부자인가?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는 성령의 임재 하심을 갈망 함을 통해 나사로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TEST 1 (0) | 2020.0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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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땐 바로 가까이 피어 있는 꽃들도 그냥 지나칠 때가 많은데, 이 쪽에서 먼저 눈길을 주지 않으면 꽃들은 자주 향기로 먼저 말을 건네오곤 합니다.
좋은 냄새든, 역겨운 냄새든 사람들도 그 인품만큼의 향기를 풍깁니다.
많은 말이나 요란한 소리없이 고요한 향기로 먼저 말을 건네오는 꽃처럼 살 수 있다면, 이웃에게도 무거운 짐이 아닌 가벼운 향기를 전하며 한 세상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해인 수녀님의 “꽃의 향기, 사람의 향기”라는 글입니다.
그런데 나무에 피는 꽃이 우리에게 향기를 준다면 나무는 우리에게 그 열매를 주기도 합니다. 꽃이 피어야 하는 행기를 위함일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꽃을 통해 열매를 맺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꽃이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에 있는 이유는 향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살아남기 위한, 즉 생존을 위한 몸부림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한 그 열매들은 다른 이들에게 생명 연장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벼에서 나오는 수확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수단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중요한 사실 하나는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 7:17-18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엘리사가 제자들을 데리고 길갈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마땅치가 않았습니다. 그 때, 엘리사는 제자들과 함께 모임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환에게 먹을 것을 마련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러자 사환은 나가서 ‘야등덩굴’에서 ‘등외’를 따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국을 끓였습니다. 그런데 이 국을 먹으려던 엘리사의 생도들이 “사망의 독이 있다.”고 하면서 국을 먹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가루’를 가져 오라고 합니다. 그 이후에 가루를 뿌리고 다시 퍼서 먹게 하라고 할 때에, 그 국속에 있던 독이 없어지므로 제자들이 먹을 수 있는 국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알게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들려주실 그 음성에 대한 기대가 있으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깨닫게 하시는 첫번 말씀은,
첫째로, 피할 수 있는 고난이 있고 피할 수 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 속에서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우리 삶 가운데는 피할 수 있는 고난도 있고, 피할 수 없는 고난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흉년과 같은 고난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피할 수 없는 대표적 고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흉년이 되면 먹을 것이 귀해 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산업사회이기 때문에 흉년이라는 표현 보다는 오히려 불황이라는 단어에 더 익숙한 듯 합니다. 그러나 흉년과 불황은 어떤 면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흉년의 때에, 엘리사의 사환은 나가서 ‘야등덩굴’의 열매인 ‘들외’를 따다가 국을 끓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당시의 흉년이 7년동안 계속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아는 것처럼 흉년의 특징 중의 하나는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과거 가나안에 흉년이 있었을 때, 그 흉년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태동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먹을 것을 찾아 사람들이 이동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엘리사와그의 생도들도 흉년 중에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흉년이 되면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는 영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는 말씀의 풍요로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알게 되는 것 중의 하나는 많은 분들이 영적인 혹은 말씀의 굶주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희랍의 철학자 ‘스피노자’란 사람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다녔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에게 왜 대 낮에 등불을 켜고 다니십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스피노자는 “‘진리’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당시가 철학의 거성들이 몰려 있었던 때였음을 가정한다면, 진리는 많은데 진리같은 진리는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죄송하지만, 저는 오늘날이 신앙적 흉년의 때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도들이 말씀의 영양실조에 걸려있습니다. 귀는 커져서 들은 것은 많은데 정작 자신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은혜 받은 것은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깨닫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깨달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이제는 이단으로 몰릴 정도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말씀의 흉년, 기도의 흉년의 때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요즘은 먹을 것이 풍성한 시대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점점 더 많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스턴트식품 때문입니다. 인스턴트 식품은 많은 먹거리를 제공 하는 듯 하지만, 정작 건강을 지키는 도구가 아니라 건강을 해치는 도구인 경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많은 말씀이 우리 귀에 스쳐지나가고 있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너무나도 많은 인스턴트 말씀이 우리 귀를 즐겁게 하려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 습니까?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내 영과 혼과골수를 쪼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복을 빌어 주는 말씀이어야만 하는 말씀으로 전락 해 버렸습니다. 진정한 말씀의 능력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리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다가오면 마음에 찔림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베드로의설교 앞에서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행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마음에 찔리는 말씀이 있을 때, 우리는 ‘목사가 깐다!’라는 표현을 하면서 들으려 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스턴트 말씀의 풍요는 우리에게 영적인 아토피피부병 및 각종의 영적 알러지를 앓게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훙년은 많은 사람을 영적 어린이로 만들어 갑니다.
n 흉년은 사람을 영적 유아로 만들어 갑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보면, 흉년이 되다보니 먹을 것이 없어 열매를 가져다가 국을 끓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을 수 없다는 아우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흉년은 우리를 유아적 상태로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고전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는 어른이 되어야 하지만, 흉년이 되면 우리가 먹을 것은 단단한 것이 아니라 젖과 같이 묽은 것을 먹으면서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깨우려는 히브리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 5:13-14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먹고 있습니까? 혹은 아직도 교회에서 목사가 선포하는 말씀 하나에 의지해서 한 주간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 제가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할까요? “인천 앞바다가 사이다로 변해도 컵이 없으면 마실수가 없어요.” 썰렁한 옛날 이야기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풍성한 것 같아도 그 말씀이 내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면 인스턴트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왜 알지 못하십니까?
우리 앞을 막는 고난은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고난도 있지만,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런데 흉년과같이 피할 수 없는 고난이 오면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흉년은 사람을 여리게 만들어 말씀을 먹고 영적 어른이 되는 길을 막게 됩니다.
사랑하는 오이코스가족 여러분!
피할 수 없는 고난이라면, 이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가까이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둘째로, 순종은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엇보다도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 속에 숨겨진 순종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신약성경의 한 모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사환의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엘리사는 사환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왕하 4:38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생도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국을 끓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어떻게 무엇을 가지고 끓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라고 명령 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사환은 순종하는 장면입니다.
신약성경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열 므나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비유를 살펴 보면, 한 귀인이 먼나라로 왕위를 받기 위해 가면서 열명의 하인들에게 열므나를 남겨주고 갑니다. 그러면서 하인들에게 한가지 명령을 합니다.
눅 19: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어떤 장사를 하란 말은 없습니다. 단지 장사 하라는 말만 있습니다. 그리고 순종한 종들은 각기 10므나 및 5므나를 남깁니다. 이에 대해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눅 19:26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달린트의 비유 및 이와 비슷한 열므나의 비유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순종은 결국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서 사환의 순종은 인간의 눈에 보기에는 미련하기 까지합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서 보면, 사환이 가져온 국의 재로는 무엇입니까? ‘야등덩굴’의 열매인 ‘들외’였습니다. 이것으로 끓인 국을 선지 생도들이 먹다가 말고 소리칩니다.
왕하 4:40
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외쳐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이것을 억지 못할 것을 준 사환으로 보지 말고 아무것도 없는 중에 선지자의 말에 순종한 사환의 모습으로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환의 순종은 절대 순종이었습니다. 광야에서 가뭄 속에서 그가 찾은 것은 아무도 먹을 수 없는 들외였습니다.
엘리사의 제자들이 먹고 심한 복통을 일으킨 야등덩굴은 “콜로신드 오이”의 덩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콜로신드 오이 Colocynth(Citrullus colocynthis)”는 박과의 다년생 채소로 잎은 수박잎과 비슷한데, 줄기는 땅위를 뻗어 가고, 과실은 둥근 오렌지의 크기로서 맛이 쓴데, 이를 말린것을 콜로신드 열매라 하여 완하제(설사제)로 사용 합니다. 그러나 다량으로 복용하면 죽음을 가져오는 독성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 채소는 가물 때에도, 잘 생장하는 유독식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식물은 엘리사의 제자들이 있던 길갈부근 및 사해 주변에 나는 것으로, 그 덩굴이 지면을 덮고, 많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데, 맛은 쓰다고 합니다. 그 말린 열매의 분말이 쓴 완하제로 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열매도 오이로 잘못 알기쉽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끓이는 사환이 알고 끓였을까요? 아니면 모르고 끓였을까요? 모르고 끓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편 알고 끓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 해 보았습니다. 만약 사환이 들외가 독초인 것을 알고 국을 끓였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환은 이 국을 먹어도 하나님의 사람은 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을 끓이라는 말씀에 순종 한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보면, 순종의 결과는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는 기적으로 나타난 것이 많이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결혼 잔치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하인들이 있었기에 더 맛있는 포도주가 만들어 졌습니다. 선지자의 명령에 순종한 나아만은 문둥병을 고쳤습니다. 말씀에 순종한 사르밧 과부는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경험 하였습니다. 이 모든 기적들은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행 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면 우리에게 기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축복은 기복적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신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사 1: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기적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적을 일으켜 주시기를 소원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려움을 앞에 두고 어떻게 순종 할 수 있습니까? 한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순종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 앞에 어려움이 왔다고 해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베델가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 집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반드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은 사망의 독을 먹어도 죽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같이 따라 해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사망의 독을 먹어도 죽지 않게 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 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신이, 즉 성령의 임재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사 11:6-8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더이상 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엘리사선지자가 가루를 넣었더니 독이 없어지고 먹을 수 있는 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 국을 독이 없는 국으로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어떻게 독이 없게 하셨습니까? 가루를 넣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먹을 수 있는 국을 만드는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루를 넣었다는 것은 마치 쓴물에 소금을 넣었다는 것과 같은 이치의 1차적으로 상징적 의미가 더 강하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그 기적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우리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굳이 가루가 필요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가루를 가져다 국에 넣게 하셨습니다.
사실 성경은 이 가루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가루의 모습을 통해 보면, 가루의 용도는 크게 두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식용가루입니다. 이는 어느 집이나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무교병을 만들어 먹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가루는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로서의 가루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 속에서 주어진 가루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하나님께 바쳐진 가루라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만약 이것이 생활을 위한 가루였으면, 선지 생도들을 먹이는데 사용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루를 사용 하지 않았다는 것은 식용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엘리사 선지는 이것을 가져 오라고 사환에게 명령 합니다. 그리고 그 가루를 사용 해서 독이 들은 죽을 먹을 수 있는 죽으로 만듭니다.
오늘의 상황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우리가 기억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가루와 같이 받으시면, 그 어떤 상황도 능히 이길 수 있는 상황이 되어지는 것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 자신을 드리라고 말씀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 삶에 어려움과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이 우리를 죽이려는 독과 같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해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가루같은 제물이 되기만 하면, 우리는 나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살리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루를 사용 함으로 죽음의 국이 생명의 국이 되듯이, 오늘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사용 하심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 하다가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죄가 많은 도성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멸망의 이유가 단순히 죄악 때문이 아니라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이 바르게 되어지기 위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찾으십니까? 의인을 찾으십니다. 가루와 같이 죽음의 국을 생명의 국으로 바꿀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오늘 성경의 이 사건은 엘리사의 기적을 씨리즈로 설교 하기로 계획하면서 처음 설교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분명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n 우리가 피할 수 있는 어려움도 있지만,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어려움도 있다는 것입니다.
n 환난 앞에서 기적을 경험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해야 하는데, 그 순종은 믿음을 바탕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n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내려 놓고 순종 한다고 해도 결국에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앞에 닥쳐진 어려움이 있습니까? 순종을 하려 해도 믿음이 약해 흔들리고 계십니까? 우리 삶에 기적을 나타 내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 하십시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가? (성경: 마가복음 12:1-9) (0) | 2015.1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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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을 넘어서 자유로(열왕기하 4:1-7)-엘리사[1] (0) | 2014.0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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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에게나 그 사람만이 당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픔에 대해서는 아무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아픔을 우리가 어떻게 이겨 내는가에 따라 우리의 삶이 힘들 수도 있고, 아름다워 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아픔을 어떻게 이겨내고 있습니까?
오늘 함께 봉독한 본문에 나오는 수넴여인과 엘리사의 이야기는 우리가 종종 듣던 이야기 입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수넴을 지나갈 때, 한 부인-성경에서는 귀한 여인이라고 불리는-이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아보고 그 남편과 함께 대접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엘리사가 수넴여인에게 무엇을 해 줄까 고민하다가 그 가정에 자녀가 없음을 알고 그 가정에 아들이 있을 것을 예언과 함께 축복 합니다. 그때 이 수넴여인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년 후에 아들을 얻게 됩니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수넴여인에게 주었던 아들이 갑작스런 죽음을 당합니다. 이 때 수넴여인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달려갑니다. 그 후에 수넴여인이 엘리사선지자에게 한 말은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이 부분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선생님, 제가 언제 아들을 달라고 했습니까? 공연히 가슴만 부풀렸다가 낙담하게 하지 말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고 하나님의 평안을 돌려 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게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 하시려고 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누구나 한가지 이상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오늘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고 있는 수넴 여인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아픔이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사람들 중에 한나라는 여인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픔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서원하며 기도 함으로 사무엘을 얻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 합니다.
한국에서 청소년의 성문제 전문가로 사역하고 있는 구성애씨는 자신이 과거에 당했던 과거 성추행의 후유증 때문에 아이를 갖지 못해서 산부인과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동안 아이를 훔치고 싶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고 고백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 한 것 중의 하나는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말 못한 아픔을 가슴에 담고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도 99세가 되도록 후손을 얻지 못하는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물론 이스마엘을 85세에 얻기는 했지만…
또, 이삭은 야곱이란 아들을 죽는 순간까지 보지 못하는 아픔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인 요셉이 죽었다고 알고 평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엘리사는 대머리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대머리로 말미암은 열등감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엘리사가 베델로 올라가는데 아이들이 엘리사를 대머리여 대머리여 하고 놀립니다. 이에대해 엘리사는 어른답지 못하게 넘어가지 못하고 아이들에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왕하 2:24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엘리사가 이렇게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엘리사에게는 나름대로의 아픔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에 고통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평온해 보여도 다른 사람은 상상하지 못하는 아픔과 고통이 그 사람에게는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미래를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딤후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지금 여러분은 어떤 고통 혹은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 성경에서 수넴여인은 이 고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당연함으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손이 없는 것에 대해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고통이 다가올 때, 여러분은 쉽게 포기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이유를 두가지로 생각 해 보았습니다.
n 하나님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고통을 주십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욥에게 하나님이 시험 당함을 허락하신 것에 대해 많은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욥을 믿으셨기 때문이라는 깨달음을 통해,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미워서가 아니라 우리를 믿으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저는 욥을 보면서 생각 했던 것은 욥이 하나님을 믿었기에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욥이 어려움을 이겨 낼 사람으로 먼저 믿었던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고통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n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려고 고통을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피하려고 노력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 고통 뒤에 우리를 위한 축복을 준비 하고 계신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사랑하는 오이코스가족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는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는 고통일 수 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고통은 하나님이 나를 믿기 때문에 주시는 고통이라는 것과, 이 고통을 이긴 후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삶에 주어진 아픔을 이기는 오이코스가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둘째로, 성장하는 믿음이 새로운 기적을 경험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엇보다도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수넴 여인의 믿음의 성장입니다.
n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은 하나님을 인정 하는 믿음입니다.
수넴 여인의 영적인 상태는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 정도 였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상의 해서 선지자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을 인정 하는 믿음입니다.
잠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인정 하십니까?
종종 저는 나 자신이 과연 어느정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사역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없이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 보곤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수넴 여인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인정 하는 믿음이 있어야 기적이 우리 삶에 나타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n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은 자라는 믿음입니다.
수넴 여인은 자신에게 아기가 없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 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자녀가 없음에 대해 이미 포기 한 듯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은 있으나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을 위해 사용 될 것에 대한 믿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엘리사 선지자가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사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하 4:16
엘리사가 가로되 돌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여인이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속이지 마옵소서.
이 믿음이 오늘 우리 믿음의 현 주소는 아닙니까? 입으로는 하나님의 축복, 기적을 기대 하는 듯 하면서 정작 우리 마음에 아무런 기대를 가지지 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수넴 여인에게 기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에 주어진 안타까움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아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이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 조차 불분명한 믿음을 가졌던 수넴여인은 엘리사선지자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믿음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을 봅니다.
왕하 4:30
아이의 어미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좇아가니라
엘리사가 함께 하기 전에는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속에 간절함과 확실한 믿음이 함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자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날마다 더 크고 분명하게 경험하고 있습니까? 만약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그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가 하나님이 믿을만 하지 못해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이 줄었기 때문입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떤 분들은 과거의 믿음에 잡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의 믿음을 지금 자신의 믿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착각이 자신의 믿음을 성장 없는 믿음, 능력을 상실한 믿음이 되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마 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막 6:12-13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그러나 그 이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막 9:18b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이 말씀이 무엇을 우리에게 알게 합니까?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퇴보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믿음의 성장이 오래 믿음과관련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자라는 믿음입니까? 분명한 믿음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믿어지는 능력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 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경험하는 믿음의 분량에 이르게 되시기를 축복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헤아리시는 분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미국에 온 이후 제 목회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가장 힘든 것이 목회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사역 하는 것인데, 사람을 대하는 것이 힘들어 질 때가 사역이 가장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수 없이 하나님 앞에 묻고 물었습니다. 정말 나에게 사명이 있긴 있는 것이냐구요! 그렇게 지쳐 가면서도 아직 사역하고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이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헤아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돌아가서 보시기 바랍니다. 게하시를 통해 수넴여인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 하나님은 그 가정에 아픔의 근원을 해결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하 4:16-17
엘리사가 가로되 돌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여인이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돌이 돌아오매 엘리사의 말한 대로 아들을 낳았더라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것인가?를 물으시면서 우리를 헤아리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주님은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무엇 해 주기를 우너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질문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주님이 계시다고 하면, 그리고 주님이 여러분에게 내가 무엇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면 여러분은 무엇을 대답하시겠습니까?
n 우리의 슬픔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헤아리시는 분임을 안다고 하면, 한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을 아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훗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히스기야의 죽음을 말씀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시면서 그 마음을 바꾸십니다.
왕하 20: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우리의 눈물을 우리 하나님은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눈물을 보고 계심을 알고 계십니까? 그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계 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그러면 우리의 슬픔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실까요?
n 기쁨을 돌려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보십시다.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는 엘리사의 행동은 기막히기 까지합니다. 죽은 아이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덥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저는 죽은 아이의 위에 엎드리는 엘리사의 모습 속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몸짓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아이는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여러분이 보시는 하나님은 어던 분이십니까?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매달리는 성장한 믿음의 사람 앞에서 기쁨을 돌려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엘리사의 말입니다.
왕하 4:36-37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서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가로되 네 아들을 취하라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여러분의 어려움이 혹은 여러분의 아픔이 무엇인지 저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근본부터 치유 해 주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아픔을 이시간 주님 앞에 내려 놓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통해 다시 세상을 품으며 살아 뵈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누구나 남이 알지 못하는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고통을 넘어서기만 하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평안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성장하는 믿음이 기적을 경험 할 수 있음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먼저 중요한 믿음의 모습은 하나님을 인정 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장하는 믿음에 간절한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우리가 신앙생활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아픔까지도 헤아리시는 하나님을 경험 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픔을 치유 하시고 기쁨을 돌려 주시는 하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오이코스가족 여러분! 그리고 CD를 통해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하나님의 축복받은 성도님들!
아프십니까?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경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그리고 건강함으로 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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