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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13. 10:53 성경이야기/구약

https://www.youtube.com/watch?v=qIOhMj8FLSs

사역 가운데 가장 일중의 하나는 주일 설교를 준비 하는 것입니다. 담임목회를 처음 시작 했을 당시, 한동안은 말씀의 소재를 찾지 못해서 남의 설교를 베께서 적도 있읐습니다. 후에, 은혜를 주셔서 남의 설교를 베끼는 일은 없어졌지만, 말씀이 깨달아질 때마다 마음에 두려움을 가젝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도 중의 구절입니다.

 

제가 2014년도에 내쉬빌을 떠나 아틀란타로 왔습니다. 내쉬빌은 사역을 내려놔야 했을 만큼 아픔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막내가 마음 속에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던 가정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을 용서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용서하지 못했다고 대답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아이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 아빠는 목사면서 성경에 있는대로 안하세요?” 아이가 내민 말씀은,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내쉬빌을 떠나기 , 가정과 저녁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스스로는 그들에게더 이상 미움이나 불편한 마음이 없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아이 앞에서 쑈를 것이지 속에 그들에 대한 미움을 버린 것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후에, 사실을 알고 기도 하던 , 작은 사건 하나를 경험하게 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게 , 은혜를 다시 경험하면서 그동안 마음 속에 있었던 미움을 버릴 있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난 주에 전했던 말씀을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주에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냥 우리에게 주신 교훈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하는 계명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기에 죄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것이며, 믿음없이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시작 하면서 오늘의 본문을 끌고 오는 질문을 다시 돌아보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출발점은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묻는 물음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을 우리에게 이어서 하신 것입니다.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단어들은, “둘째”, “이웃”, “ 자신 같이그리고 40절에 나오는 강령이라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이웃 누군지를 정의하고. “ 자신 같이라는 말을 살펴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라는 말과 계명, 강령 함께 생각해 것입니다.

 

 

첫째로, 누가 이웃입니까?

 

오늘 말씀의 주제는 출애굽기 20:12 이하에 나오는 6-10계명입니다. 구절에는 부모공경 비롯해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그리고 탐심 이야기 합니다. 모든 구절은 사람과 사람 혹은 이웃과 이웃간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많이 들으셨겠지만,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이라면, 6-10계명은 우리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말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이 되기 위해 십계명에는 여러가지 행위의 기준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이웃이 되기 위해 다른 몇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이지만, 읽어 보겠습니다.

 

5:38-47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말씀은 십계명과 더불어 우리가 이웃에게 혹은 주변에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님께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과 동등한 계명이라고 말씀 하셨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금 생각 해보게 되는 것은 누가 이웃인가? 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마태복음 22장과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율법교사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리고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은 자리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러자 예수님께 질문했던 자는 자비를 베푼자 이웃 이라고 답합니다.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비유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구절을 보면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웃에 대해 무엇을 말씀 하려고 하시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누가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이와 같이 하라!” 것이 답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하라!” 대답이 돌아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누가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누군가의 이웃이 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떻습까?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은 이웃입니다. 도움이 되지 않으면 무시 당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사랑은 커녕 세력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욕먹는 이유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어서 욕을 먹습니까? 아니면 교회 안에서 세상보다 추한 모습을 보여서 욕을 먹습니까? 우리가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상황입니다.

 

말씀이 저에게 도전이 되는 이유는, 말씀은 네게 도움이 되는 이웃을 찾으려 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이웃이 되라!” 하시는 음성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삶에 들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군가 이웃이 되기를 기대 하지말고, 먼저 네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라!” 말씀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주변을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도 건강이

앞서 읽은 마태복음 5:38 말씀에 보면 우리가 말씀 대로 살면 내가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분명히 누군가의 이웃이 되는 삶을 살도록 말씀 하십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누군가의 이웃이 되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내자신 같이 사랑하십시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여기서 우리가 봐야 단어가 있습니다. “같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단어는 헬라어의 wJ" 단어로, 뜻은 처럼, 같이, 똑같이입니다. 영어에서는 단어를 “as” 번역 했는데, “as” 가지는 가운데 “…맡큼이란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구절을 우리가 직역하면 몸과 똑같이혹은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단어는 간단한 말이지만, 사실 단어가 가지는 무게감 대단합니다. 오늘 본문의 같이라는 단어는 주기도문에서도 사용 되었습니다.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단순하게 같이라고 하지 말고 똑같이라고 단어를 바꿔보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과 똑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혹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만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맞습니다. 그렇게 보면 단어의 뜻은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역시 용서하지 마시라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역시 사랑하지 마시라는 말씀이 되는겁니다. 여기까지는 이해 하신 줄로 믿습니다.

때문에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 자신과 같이 말을 심리학 적으로 접근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잠깐 심리학을 이야기 한다면, 네이버사전에서는 심리학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인간의 행동과 심리과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경험과학의 한 분야를 뜻한다. 인간과 동물의 행동이나 정신과정에 대한 다양한 질문의 답을 찾는 과학 중의 하나가 바로 심리학이다.

 

마디로, “심리학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학문으로 연결시킨 극히 인간 중심의 학문이다.”라고 있습니다. 사람 중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은 사람을 이해하고, 정신적, 감정적 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데,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없다 말씀으로 해석하고 전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것은, 우리가 말하는 신앙은 심리학적 해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문자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모세와 여호수아의 르비딤 전투를 말씀 드릴 , 여호수아는 430 종살이를 하던 사람들과 함께 나가 아말렉 군사들과 전쟁을 하고,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산에 올랐습니다. 장면을 생각 해보면, 싸움에서 이기는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그런데 그렇게 합니다. 훗날의 일이지만, 이스라엘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칼과 창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택한 승리의 방법은 순종이었습니다. 여기 어디에 심리학적 접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심리학적 접근 보다는 예수님께서 자신 같이라고 말씀 하셨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지금 마태복음 22장의 말씀은 우리가 함께 가고 있는 출애굽 광야 여정에서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 신약성경에서 찾아 설명하는 과정임을 잊지 마시고 따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십계명 돌판의 10계명 중에 1-4 하나님과 관련된 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 5-10계명을 이웃을 사랑하는 이라고 말씀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5-10계명을 살펴보면,

 

20:12-17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 살인하지 말라 

14. 간음하지 말라  

15. 도둑질하지 말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저들에게는 하나님과 이웃만이 존재합니다. 물론 아말렉과 같은 적들도 존재 하지만, 기본적으로 위로는 하나님, 옆에는 이웃이 존재 했습니다. 그렇다면 광야생활 동안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누구였겠습니까?

그래서 십계명의 5계명에서부터 10계명을 정리하자면, 제겐 말씀들이 이웃 사랑으로 보여집니다. 여기 어디에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남을 사랑하기 위한 필수 조건도 아닙니다. 나를 사랑해야 이웃을 사랑할 있다고 주장 하는 것은, 남을 사랑하기보다 나를 사랑하기 위한 핑계일 뿐입니다.

 

제가 여러 운동을 좋아하는데, 중에 볼링이 있습니다. 제게 처음 볼링을 가르쳐 주신 분은 어렸을 적에 소아마비를 앓아서 다리를 많이 불편한, 구두 수선하던 형제였습니다. 어느날, 저와 볼링을 하고 싶다고 하시면서 볼링장으로 데려 가셨습니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넘어지면서도, 저에게 공을 던지는 법부터 차근 차근 가르쳐 주셨습니다. 생각에, 그분의 삶의 조건이 저보다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40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볼링장에 때마다 분이 생각납니다. 이후로 신체적으로 불편한 분들에 대한 개인적 편견이 많이 없어졌습니다.저보다 불편한 몸을 가진 그분은 스스로를 먼저 사랑할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심리학이 말하는 자신을 먼저 사랑했기에 저에게 볼링을 갸르쳐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심리적 극복 이전에 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신 분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웃고 감사하며 살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웃을 향한 계명을 지키는 것 심리적으로 완성되어서 한다기 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경험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것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 같이 보면서 자신 같이라는 말씀은 이웃 사랑의 자격 조건 아니라 이웃 사랑의 기준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의 병행 구절에서 주님은 저들의 질문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비유에서 깅도만난 사람을 도아 주었던 사마리아인, 만약 자신을 사랑해야 했다면, 강도가 나온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도망쳐야 했던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도망친 것이 아니라 다친 사람을 돌봐 주었습니다. 말슴을 하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말씀을 준비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컵에 설탕물이 들었으면 설탕물이 나올 것입니다. 만약 콜라가 들었다면 콜라가 나올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속에 채운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요? 바라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 이웃 사랑 하나님게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삶으로 감당하는 성도 되셔서 하나님 앞에 삶이 의롭다인정 받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웃 사랑도 계명입니다.

 

저는 지난 주에 말씀의 주제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계명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웃 사랑도 계명입니다.”라고 발씀 드리겠습니다. 22:39절을 다시 봅니다.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여기서 보면,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쓰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첫째와 같은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같이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헬라어로는 o{moio" 말입니다. 의미를 살펴보면, “…같은”, “유사한”, “닮은이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했던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켜야 계명이라고 말씀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다시금 깨닫게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신앙인이 쌓게 되는 덕목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생각을 보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고 일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말씀을 보면,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고 싶어하는 몇가지를 알수 있는데, 서로 사랑함으로 성도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낼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가지는, “ 계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지켜야 의무가 있는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욕을 먹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사랑해야 자와 싸워야 자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한국교회에는 영향력이 적은 일이라 생각하고 말씀 드린다면,

 

1: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이것이 죄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20:13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동성애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라면, 죽음에 이를 만한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나쁘다고 말하지만, 영혼에 대해서는 구원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싸우는 것이지 사람과 싸워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죄와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입니다.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한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영혼의 가치는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요즘 말하는 100세에 이르는 육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도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영혼을 위해서 무엇을 사용하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가치는 얼마나 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지금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의 영혼의 가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 30 전에 경제적으로 너무도 힘든 때에, 차가 한대 필요했습니다. 아는 분이 소개 주셔서 15년이 넘은 차를 2000불에 판다고 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소개 주신 분이 가격을 싸게 달라고 하는 뜻으로 제가 전도사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차주인이 하는 말씀이, “전도사님, 파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차가 링컨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전도사가 링컨 탄다고 말이 있습니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저는 “2000불짜리 15년이 지난 차인데요?” 라고 했더니, “새차 혼다나 토요타를 타면 말을 하지 않지만, 링컨을 타면 수근 거릴 것입니다.”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엔 차를 사지 못하고 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행동으로 말미암아 신앙생활에 지장을 받거나 맘이 불편해 진다면, 기꺼이 포기 있어야 하는 것이 이웃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은 이것을 계명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렉서스 탑니다. 대신 몇년도인지는 묻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이웃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웃사랑을 새계명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계명을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는, 내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이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당 하기 위해 몸부림 치며 기도 해야합니다.

제가 경험해 바에 의하면, 우리 인간의 성정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말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말이 있을 만큼 우리는 태생적으로 남이 나보다 되면 불편합니다. 그런 우리 성품은 다른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성령충만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웃사랑, 원수사랑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겁니다. 밥달라고, 세상의 달라고 잘되게 달라고 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은데 이것이 너무 힘드니 힘달라고 기도 하는 겁니다. 이웃 사랑하고 싶은데 마음이 그렇지 못하니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있게 달라고 기도 하는 겁니다.

 

오늘 말씀, 여러분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주님은 누가 이웃인가 보다 네가 이웃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웃 사랑의 기준은 무엇이빈까? 나를 사랑하듯 사랑하라고 하심으로 이웃 사랑의 기준이 나입니다.

이웃 사랑은 수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런데 감당할 자시닝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 합니다. 이웃을 사랑할 만한 되게 달라고

오늘 말씀의 제목 기억 하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이웃 사랑도 계명 이라네요!”

posted by no turning b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