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 하면 가장 먼저 생각 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국에서는 볏단이 생각이 났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오니 칠면조(Turkey)가 생각이 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1621년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부터 미국으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청교도들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그들이 1620년 12월 11일 메사추세츠의 플리머스에 도착하였을 때, 저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풍요로운 황금 들판 대신, 살을 에는 거친 겨울 바람과 황량한 들판 뿐이었습니다. 오랜 항해에 지치고 병든 그들은 이제 모진 추위에 굶주려 죽기만을 기다릴 때 그들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은 이 땅의 임자인 왐파노그(Wampanoag) 인디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왐파노그 인디언의 도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의 102명중 이듬해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56명밖에 되지 않았을 정도로 그 해 겨울은 혹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의 농사는 대풍작을 이루어, 남은 사람들은 자기들을 도와준 인디언 90여명을 초대하여 사흘간 감사축제의 마당을 펼쳤습니다. 이때가 1621년 10월 중순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추수감사절의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1년에 한번 밖에 없는 추수감사절이 됩니다. 일년에 한 번 추수감사절을 지내던 당시와 비교하면 오늘 우리의 추수감사는 인스턴트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의 추수감사는 한 해를 지낸 전체적인 감사인데 오늘 우리의 추수감사는 그냥 단순한 “절기”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내용보다 드려지는 헌금에 집중하는 교회들을 보면서 마음이 안타까움도 생깁니다.
어쩌면 목회자들에게 가장 힘든 설교는 절기설교 일 것입니다. 저 역시 감사주일에 대해 이런 저런 묵상을 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런 저런 감사를 이야기하기 보다, “감사예배”를 하나의 “영상”이라고 생각하면서 등장인물 및 배경을 그리며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우리가 “감사”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감사예배”에서 “감사”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감사”는 제사 드림에 필요한 “소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추수감사 주일을 지내면서 드리는 “감사”를 소품이라고 할 때, 우리가 생각 해 봐야 할 것은, “감사”라는 것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감사”를 소품으로 준비함에 있어서 “어떤 마음으로 준비하는가?”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준비 과정에 내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거나 혹은 받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선물을 주고받는 경우는 대부분 상대방에게 감사 혹은 친절을 주고받음에 의해 선물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한 번 돌이켜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내가 주었던 선물은 어떤 선물이었을까? 분명 마음이 가는 분들에게는 나름 힘에 겹도록 선물을 했을 것입니다. 가식으로 해도 되는 경우에는 적당히 혹은 대충 선물했겠지요. 그런데 사업상 이유 혹은 어떤 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잘 보여야 하는 상황에서 했던 선물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선물, 다시 말해 상대가 거절하기 힘든 선물을 했던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추수감사 주일에 드려야 하는 감사의 제물/선물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없어서는 안되는 “소품으로서 감사”. 이 소품 하나로 “감사예배”의 가치가 정해진다고 하면, 이 “감사”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감사”는 “몸”을 드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말하고 있는 “너희 몸을…거룩한 산 제물”이 우리의 몸이라고 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죽음을 통해 우리 몸을 드리기를 원하신다고 바울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 말씀을 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몸”은 몸 그 자체 보다,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구약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제물의 조건을 생각해 보면,
(레22:21)
만일 누구든지 서원한 것을 갚으려 하든지 자의로 예물을 드리려 하여 소나 양으로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리는 자는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
“흠이 없는 온전한” 이것이 제물의 조건이 됨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산 제사를 위한 내 몸은 내 삶이 뒷받침된, 단순한 몸이 아니라 내 삶을 드리는 것이 참된 제물로서, 가치와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몸을 제사로 드리는 것은, 단순히 몸 이상의 행위를 동반한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삶의 어떤 부분이 감사의 조건이 되고, 그런 삶을 하나님께 감사의 선물로 드릴 수 있을까? 여러가지 한 해 동안의 삶을 드릴 수 있겠지만,
v 삶의 고난을 넘어섬에 대한 감사
지난 3월 코로나로 시작된 사회적 어려움 속에서 저는 새로이 잡은 직장에서 6개월 만에 그만 두어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제겐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감사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혹은 상상하지 않았던 여러가지 상황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 감사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도 그 속에서 이기게 하심을 경험하며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다시 말해서, 삶으로 드리는 감사는 나에게 주신 세상의 복이 많아서 드리는 감사도 있을 수 있지만, 고난을 겪고 있음에도 고난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심을 믿고 나가는 삶, 이것이 곧 삶을 드리는 감사입니다.
v 하나님과의 개인적/인격적인 만남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 삶이 변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찾아오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들은 주님을 만났으며, 그 이후로 삶이 변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삭개오가 그렇게 변했습니다. 사울은 변해서 바울이 되었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남편을 다섯번 바꾼 당시로서는 천하다 손가락질 받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개인적/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요4:29-30)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이 여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옵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상관하지 않으신 주님을 만난 이 여인의 외침은 자신의 부끄러운 삶을 드러내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리는 삶으로 드리는 감사였습니다. 삶으로 드리는 감사는 이처럼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내가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온 “감사예물”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삶입니까?
두 번째로, 하나님이 주인공입니다./우리의 감사는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하나의 영화 속 장면을 보며, 소품을 살펴 보면, 이 배경이 어떤 시대인지 혹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알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금년에 제가 받은 충격 중의 하나는 한국 영화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죄고 상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기생충”이란 영화입니다. 이 영화 덕분에 저는 속칭 “국뽕”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 딸이 재미있다고 해서 그저 “재미있는 영화”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영화가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 속에 담겨 있었던 여러가지 의미와 방향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듣고 나서 저는 저 자신이 이 영화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본 “그저 그런 관객”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감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만약 하나님이 내 삶에 관계하시는 이유, 의미 아니면 방향성을 우리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저 그런 성도 아닐까요? 내가 드리는 감사는 그저 그런 감사가 아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내가 목사든, 장로든, 안수집사든 혹은 권사 아니면 집사, 이런 것들은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설계하신 내 인생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그저 그런 성도일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감사는 진짜 감사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상황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듯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종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혹은 예물에 대해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마치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헌금을 드리는 것 같습니다. 감사를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드리는 것인가?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의 제가를 하나님은 무조건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가인과 아벨의 사건은 두 형제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 것에서 시작됩니다.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아벨의 제사와 달리 피의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만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금전적이니 것으로 말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드림의 기준입니다.
(눅21: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눅21:3)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세상의 많고 적음으로 평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드리는 자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믿음 없는 예물을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냥 내가 헌금이라고 드리면 받으실 것이라고 혹은 절기가 되었으니까 드린다고 드리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이런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형식적인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말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름진 제물/많은 물질을 원하실까요? 아니면 우리 마음을 먼저 받고 싶어 하실까요?
여기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심각하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의 감사는 누구를 향한 감사인가? 내 감사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나인가? 하나님인가?
마지막으로, 나의 자리는 감사를 드리는 자의 자리입니다.
감사를 드리는 자는 감사를 받으시는 자의 마음에 합한 감사를 드리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감사를 드리면서 조건을 내 걸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 주시면 저렇게 하겠습니다.” “물질을 부어 주시면 헌금을 지금보다 몇배를 더 하겠습니다.”라는 식입니다. 이것이 과연 신앙인의 자세가 맞는 것일까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신비한 조건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 동시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평화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 이런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런 일이 있었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오늘 우리가 드리는 감사를 통해서 나타나야 할 일은, 하늘 하나님께는 영광이 그리고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의 평화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통해서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것은 이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조연의 역할을 우리가 하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사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방법과 하나님이 받으시는 감사의 방법이 다를 수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요? 나의 최선이 곧 하나님이 나에게 기대하시는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
성경에는 어느 날 예수님이 성전에 가셔서 화를 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여기서 예수님이 화를 내셨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저들이 성전 안에서 장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돈을 바꾸고, 제물을 그곳에서 돈을 주고 사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흠 없는 양을 드리기 위해 집에서 기르던 양 한 마리의 값보다 훨씬 비싼 값을 치루고 흠 없는 양을 드렸습니다.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에게 감사드리는 일로 먼 곳에서 와서 화폐 단위가 달라 돈을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정말 예수님이 화 내실만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화를 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생각 해 보았습니다.
주님이 기대하신 것은 최선을 다한 과정입니다. 최선의 결과가 아닙니다. 양을 먼 곳에서 데리고 오느라 먼지가 타고 부분적으로 깨져도 우리 하나님은 그 부족함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조연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나의 삶이 깨졌어도 우리 하나님은 그 깨진 것을 안고 우리를 위해 우시며 수고했다고 하실 분입니다. 최소한 우리가 드리는 감사 안에서 우리는 행인 1, 행인 2가 아니라 주연급 조연입니다. 내가 아니면 하나님 역시 나를 통한 영광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나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DL1]
우리가 깨어지고 넘어진 모습이라고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 가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조연으로 드리는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예수님과 베드로가 갈릴리에서 만나는 장면을 통해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하십니다.
(요21: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우리가 알고 있듯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 앞으로 가장 먼저 달려가는 모습, 저는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감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 해 보았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른 감사는 완전한 감사가 아닙니다. 부족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주님이 주인공 되심을 인정하고 드리는 감사, 그 자리에 부족하고 상처뿐인 내가 있고, 그 모든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인도하심을 믿고 드리는 감사, 이것을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받으시기를 원하는 감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 찬양기억하시지요?
(합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이런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완전한 감사를 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내 중심으로 하나님에게 감사드리는 것을 보시고 싶어서 그런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과연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만한 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슨 의미로 우리에게 이런 감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나의 삶에 최선을 다한 우리의, 나의 모습을 보고 싶으셨던 것은 아닐까요?
금년에는 이 말씀이 제게 참으로 귀하게 다가옵니다. 금년은 참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한 한해였습니다. Lay off 된 후, 여러 곳에 이력서를 넣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불러주지 않습니다. 나이가 있어서 몸으로 때우는 것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기도하고 매달려 보았습니다. 어느 날, 이런 말씀이 머리를 가득 채웁니다.
(고후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이 제 마음에 가득 채워지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마음 속의 외침은 한마디였습니다. “하나님!”
2020년 가을에 맞이한 추수감사 주일에 과연 내가 드리는 감사는 어떤 감사일까요? 진정한 감사 준비되었습니까? 그 감사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믿음으로 드려지는 감사입니까? 그리고 이 감사의 모든 것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드려지는 것인데,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터지고, 깨지고 찢어진 상처뿐인 삶으로 드리는 감사까지도 귀하게 받으시는 주님 앞에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순례자로 서셨습니까?
바라기는 2020년의 감사는 내 삶을 통해 드리는 감사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많은 감사, 더욱 큰 감사라고 하나님 앞에 두리는 감사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삶으로 드린 저와 여러분의 감사를 통해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평화 주심을 가슴 벅차게 기대하는 2020년 추수감사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사랑으로,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심으로 축복하고 축복합니다.
[DL1]Rk
'성경이야기 > 귀로 읽는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앙생활 101] 두려우신가요? 믿음으로 이기세요! (눅 2:8-11) 대강절 2 (0) | 2021.02.23 |
---|---|
[신앙생활 101]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다음에는? (히브리서 9:28) 대강절1 (1) | 2021.02.23 |
[신앙생활 101] 환경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 찾기 (사도행전 16:25-28) (0) | 2021.02.20 |
[신앙생활 101] 인정 받는 그리스도인 (마태 7:21-23) (1) | 2021.02.20 |
[신앙생활 101] 당신은 부자입니다. (누가복음 18:18-30) (0) | 2021.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