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이란 말을 사전적 정의로 말하면 “야후”에서는 “종교를 믿는 사람. 기독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종교를 믿는 사람” 그러면 성도는 무엇일까? 야후에는 성도를 정의 하는 말이 없다. 대신 위키백과는 성도를 “기독교에서 신자들을 달리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 하고 있다. 두 단어의 뜻이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그 내용을 알면 같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필자가 정의 하는 바에 의하면 “교인”은 쉽게 말해서 “교회회원(church member)”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교회에 적을 두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의미 하는 것이다. 이 숫자는 한국의 경우에 천만이 넘는다고 보여 진다.1) 하지만, 성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교인과 같아 질 수가 없다. 성도는 영어로 표기하면 “saint”가 되는데, 이는 영한사전에서 사전적 정의를 살펴 볼 때 “성자 혹은 성인”으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교인이 되지 말고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성도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성경을 안다고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알아도 성도가되지 못할 수 있는 이유는 성도는 교인이 될 수 있지만, 모든 교인이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능력으로는 다른 사람이 성도인지 교인인지 구분핳할수가 없다. 하지만,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혹은 전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혹은 각종의 능력을 나타낸다고 해서 그들이 성도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약시대에 성경을 잘 알고 있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우리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 하셨는가?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태복음 3:7)
즉 성경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특히 우리는 호세아 선지자가 했던 말을 기억해야 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경을 몰랐겠는가? 바리새인이 성경을 몰랐는가? 사두개인 혹은 서기관들이 성경을 몰랐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을 아는 지식은 있으나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에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질책 하신 것이다.
성도가 되지 못하고 교인에서 머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줄 아는가?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제 친구가 중풍병에 걸린 친구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에게 오는 장면이 있다. 이 때, 그 앞에 가득 사람들이 있어서 친구들은 지붕을 뜯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막 2:4)
여기서 길을 막고 있었던 “무리”라고 표현 된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바로 바리새인들과 교법사(서기관)들이었다. 말씀이라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다. 누가복음은 그 무리들을 이렇게 설명 하고 있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성경을 알아도 하나님을 경험 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 나오는 자를 막는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는 아무런 기적도 역사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에게 나오는 자들을 막고 있을 뿐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을 읽고 성경에 있는 것은 알고 있는 듯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수박 겉핥기식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아직은 성도가 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아직은 교인이라는 말이다. 성도가 되지 못한 교인은 교회의 자리를 채우는 일과 교회의 재정을 감당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은혜 체험을 했다고 자연히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지식뿐 아니라 능력을 행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종종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는 자들 앞에서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종종 사이비 기독교(이단이라 불리는)지도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면 혹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 하셨는가? 심지어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능력을 나타낸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마 7:23)
대신 성도(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에 대한 기준을 이렇게 정의 하신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마 7:21)
즉, 성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믿음이지만 그 믿음이 주님에게 인정받는 방법은 주님이 원하시는 삶으로의 행함인 것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배우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신앙적 혼돈스러움을 생기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광신자처럼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도와 광신자가 같을 수는 없다. 그리고 특히 교인들은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을 돌아 볼 필요가 있고, 자신이 성도의 자리로 나가고 있는지 혹은 교인의 자리에서 머무르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내가 성도인지 교인인지 모르겠으면 다음의 문제를 스스로 질문하고 답해보라.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되도록 기도 한다. (예, 아니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해 주시면 나는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예, 아니오)
내가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은 나를 반드시 축복 하실 것이다. (예, 아니오)
만약 위의 질문들 중에 한 번이라도“예”라고 대답했다면 당신은 아직 성도가 되지 못했다고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오늘날 현대 성도들의 가장 보편적인 모습은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 혹은 마술램프의 ‘지니’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은 해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서 제자들의 모습을 보라. 과연 저들이 오늘 우리가 원하는 그런 것을 원했는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것을 포기하며 주님을 따랐던 것을 볼 수 있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목회를 하면서 종종 겪게 되는 일들 중의 하나는 교회내의 직분에 관한 것이다. 필자는 교회 내의 직분에 대해 나름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대로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두 가지를 생각하면 우리는 스스로가 다순히 교인인지 혹은 성도인지를 스스로 진단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첫째는 성도다움의 문제이다.
성경은 성도는 거룩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이 거룩하므로 우리에게 거룩하도록 요청 하셨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다라로 하시면서 성도된 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실 것을 이렇게 기도하셨다.
요 17:16-17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둘째는 관록이 아니라 속 사람의 문제이다.
과거에 은혜 받았던 시절의 경험을 오랜 기간 동안 반복해서 사람들에게 말함으로 자신의 신앙이 은혜 충만한 신앙임을 말하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 현재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 하도록 한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성도의 모습은 나이와 상관 없이 젊고 힘 있는 믿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믿음의 힘과 새로움을 보이지 못하고 과거의 신앙을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과거에는 성도 였는지 몰라도 지금은 교인으로 전락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인이 누군가를 말함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 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절대기준이 없는 사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누구보다 나으면...”이라는 상대적 기준의 잣대를 가지고 성공과 실패를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성경은 상대적 신앙인이 아닌 성경적 절대 신앙인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인이 되고 싶은가? 아니면 현대인들에 대해 상대적인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가? 성도의 대답과 교인의 대답은 분명 다르다. 현명한 현대인들이여! 지혜로운 선택으로 교인에서 벗어나 성도가 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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