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르비딤이 므리바로 바뀌었을까? (출 17:7)
“아브람”과 “아브라함”, “사래”와 “사라”. “루스”와 “벧엘” 이들의 차이를 아시는가요? 예, 같은 사람 다른 이름, 같은 자리 다른 이름입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에는 같은 사람 혹은 같은 자리에 하나님이 세로이 붙여주신 다른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물론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음 또한 아실 것으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은 7절만 읽었지만, 1절부터 7절까지가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1절에 보면,
출 17: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말씀이 시작하는 부분에서 지명이 등장 하는데 “르비딤”이라고 불려지는 곳입니다. “르비딤”이란 이름의 뜻은, “쉬는 곳”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물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쉴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이 시작 되고 모든 상황이 정리 된 이후에 하나님은 그곳을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게 하십니다. 바로 “맛사 혹은 므리바”라는 이름입니다.
출 17:7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새로운 이름, “맛사”라는 이름의 뜻은 “시험하다, 유혹하다”란 뜻입니다. 동시에 “므리바”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그 뜻은 “싸우다, 꾸짖다”는 의미입니다.
원래 “쉬는 곳”의 의미를 가진 자리가 “시험하는 자리, 싸움의 자리”로 바뀐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말씀 가운데 지명이 바뀐 것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첫째로, 불평(불신)이 르비딤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서 봅니다
출 17:2-3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제가 지난 주에도 말씀을 전하면서 불평은 있는데 기도가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왜 저들은 마라의 물을 경험 했는데도 여전히 물이 없음에 대해 불평하고 있는 것일까? 더직접적으로 말씀 드리면 왜 저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 했으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일하심 혹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기서 “믿음”을 다시 한 번 정리 해 보기 원합니다. 믿음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구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두가지 기준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하고,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빋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구절을 기억 하실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여기서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하나님임을 설명 하면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의미는 “스스로 있는 자” 즉 “하나님의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즉 믿음은 나의 하나님 되신 여호와를 인정 하는가?에서 시작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항상 시작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를 찾아 오셔서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인정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긴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세상에서의 복을 이야기 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문자적인 해석을 보면 “보상”이라는 말도 됩니다. 즉 우리의 믿음이 엇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이런 믿음을 머리 속에 두고, 오늘의 사건으로 돌아가서 보면, 이스라엘은 과연 무엇때문에 지금 불평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들은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 했습니다. 먹을 수 없는 물을 먹을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 했습니다. 먹을 것으로 불평 할 때, 고기와 만나로 먹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경험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정도 되면 물이 없어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공급해 주실 것을 긷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불평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진 지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르비딤은 “쉬는 곳”이란 이름이 말해 주듯 당시 광야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쉴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겨울에는 비가 오지 않아 물이 없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겨울에는 사람들이 지나지 않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학자들의 견해로는 이스라엘이 도착한 시기가 겨울이어서 그곳에 물이 없었던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자연 현상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서 불평을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평에 반드시 함께 했어야 하는 것은 기도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분노 했습니다. 그에 대해 모세는 위기감을 느끼고 하나님에게 이렇게 간구합니다.
출 17: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제가 여기서 보고 있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해도 믿지 못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기적을 기적으로만 맏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지나간 시간에 내게 행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적 문제 앞에서 불평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계속 반복해서 말씀 드리지만, 우리는 하나님에게 불평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불평을 들으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불평을 들어 주시는 하나님은 내 문제를 해결하실 방법 또한 알고,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순간에 우리가 보일 믿음은, 하나님이 해결 해 주시지 않아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능력이 있으신데 나를 위해 행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럼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하나님께 물으며 고민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간 것 같습니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이 있는 성도라고 하면, 여기서 멈추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하시는 일을 믿고 기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나의 문제를 해결 해 주시지 않아도 여전히 하나님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무릎 꿇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풀병으로 끝나는 신앙인이 되지 말고 불평을 넘어서 믿음의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군사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번째, 불평의 이유는 불신입니다
이스라엘의 불평은 모세를 향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7:2 후반절입니다.
출 17:2b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저들은 모세에게 불평을 하는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불평이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란 것을 모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불평은 불평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믿어야 하는 대상입니다. 우리가 불평하기 보다 경배해야 할 대상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믿음을 하나님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경외(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 하면, 항상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리려던 장면을 이야기 합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서 찾은 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이었습니다.
창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서 본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서 “경외”라고 하는 단어가 영어성경에서 보면 “fear,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을 이전에도 말씀 드린 적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시험하기까지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약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는 종종 우리가 시험 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직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하면 우리가 직면한 현실적 어려움은, 현실에서 경험하는 그 시험같은 것들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말로 이런 상황을 해석 할 수 있겠지만, 저는 그것을 단련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욥기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원래 단련이란 말은 철공소에서 사용되던 말입니다. 불에 쇳덩이를 넣고 빼서 망치로 치고 다시 불에 넣고 또 망치로 때리고 찬물에 넣고 다시 불에 넣고… 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각종의 값비싼 물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물이 없는 어려움은 현실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그런 어려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 능력에 의지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에게 간구하며 하나님을 믿으면 문제도 해결 되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인정 받는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이런 생각을 다시금 해 보았습니다. 왜 현실문제가 하나님 보다 크게 보이는 것일까? 왜 현실 앞에서면 나는 하나님을 보지 못할까? 아니 왜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까?
현실은 손가락 같아서 눈을 막고 있는 손가락이 태양을 가리듯, 우리의 현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음을 인정 합니다. 뿐만아니라 아기가 엄마가 함께 있을 때 안전하다고 여기다가 잠에서 깨어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 가져지는 두려움으로 울게 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삶의 한 순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 때에 두려움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불평이 터져 나올 수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이유는 역시 하나님을 믿지 못함에서 오는 불신입니다.
제가 사역으로 부름 받았을 때, 제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역이 힘들 때마다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현실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역을 하지 못하게 됨에 대해 불평이 식지 않을 때, 하나님이 코로나 사태를 통해 인터넷 설교를 하면서 저 나름대로 숨을 되었습니다. 처음 계획을 세운 것이 10년도 넘었는데, 하지 못하고 게으름을 부리다가 10년이 지나 현실 앞에서 할수 있도록 인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다음의 구절을 보게 하셨습니다.
사 43:2-3a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제가 이 말씀을 제게 새로이 주셨다고 하는 이유는 “물 가운데로 지날 때”, “강을 건널 때”, “불가운데로 지날 때”가 우리 인생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내 삶에 현실로 닥쳐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네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이 나를 흔드시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쓰러져서 삶을 포기하려는 나에게, “정신차려! 나를 봐, 나 너의 하나님 여호와야!”라고 나를 흔들어 깨우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된 여러분!
지금 나의 현실이 불평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해도, 그래서 불평할 수 밖에 없어도, 여전히 함께 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기억하는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정신차려! 나를 봐, 나 너의 하나님 여호와야!”
마지막으로, 불평(불신)을 해결해 주신 이유, 그리스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유있는 불평을 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 합니다.
출 17:6-5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모세는 하나님에게 명령을 받고 그대로 행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장소가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출애굽의 사명을 받은 그 자리입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반석”을 정해서 그 반석에서 물이 나올 것을 말씀 하십니다. 대신 증인이 있어야 하겠기에 장로들을 모셨습니다. 사용하는 도구로는 모세가 출애굽사역을 시작될 때부터 사용 했던 지팡이입니다. 지팡이에 대해서 성경 한 곳만 보면,
출 4: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출 4:2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지금 모세가 가지고있는 지창이는 모세의 지팡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쓰시는 하나님의 지팡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심으로 일하신다는 것과 쓰실 도구는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방법적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직접 결정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관심있게 보는 것은 “그 반석”입니다. 산 위에 있는 그 많은 반석 중에 굳이 한 반석을 정하시고 “그 반석”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정확하게 “그 반석”위에 선 것입니다.
여기서 “그 반석”은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지난 번, “마라의 쓴 물”에 던져졌던 나무가 그리스도의 사징적 의미 였듯이 오늘 반석 역시 우리에게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예수님은 요한복음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 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 말씀들을 통해 우리가 분명하게 보는 것은, 반석은 예수님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물은 예수님이 허락하신 생명의 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적 갈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요한복음 4장에도 보면,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이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오늘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이 아닐까요? 광야의 삶을 감당하게 하는 물, 우리의 생명을 연장 시키는 물. 이 물이,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공급됨을 오늘 출애굽 광야에서 우리에게 예시 되고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갈증으로 불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사 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계시록에도 목마른 자들에게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시는데,
계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이사야서와 계시록 에서 공히 말씀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물로 나오라고 하시면서 두가지를 말합니다. 한 가지는 “물마시기 위해 아무것도 필요없다.” 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와야한다”는 것입니다. 대가를 치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물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물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저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현실의 막막함은 우리를 불평하게 합니다. 그리고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이같은 막막함 혹은 정말감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환경입니다. 이런 일들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첫번째는 불평은 “쉬는 곳”이라는 뜻의 “르비딤”이 “시험하다, 유혹하다” 라는 뜻의 “맛사”, 그리고 “꾸짖다, 다투다”는 의미의 “므리바”로 이름이 바뀌듯, 불평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짓게 합니다. 그리고 충분히 이유있는 현실의 막막함에서 시작된 “불평”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평하며 주저앉는 우리에게 “정신차려! 나를 봐, 나 너의 하나님 여호와야!”라고 하는 말을 들음으로 불신에서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의 막막함을 해결해 주시기도 하지만, 반석의 물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로 통해서 현실에 머무르지 말고 영생을 얻으라고 하시는 것이라 깨닫게 되었습니다.
현실을 통해 주어지는 불평, 이것은 우리가 믿음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이며,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된 여러분!
유혹하고 넘어뜨리며, 우미 가득한 이 세상의 현실이 나를 막는다해도, 불평하며 믿음 없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자가 되지말고, 절망의 순간에 우릴 일으키시는 반석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이 공급해 주시는 생명수를 통해 광야같은 현실을 이기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 백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