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 101] 뭣이 중한디? (야고보서 2:18)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지난 주간에 한국과 미국의 뉴스를 달궜던 사건은, 미국 현직 대통령이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하는 것과, 한국에서 한 가정으로 입양된 16개월 된 정인이가 학대 끝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는 아픈 소식이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문득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과연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누구로 기억해 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이는 오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욕을 먹고, 성도들이 손가락질을 당하는데, 정작 자신들은 그들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 기억 하십니까?
눅 20:25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세상의 법이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한다면 우리는 거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에 교회가 자중해 달라고 하면 이같은 사회적 요구에도 협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썪은 것에 대한 회개는 없고, 오히려 사회적 요구가 잘못된 것이라 욕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혼란스럽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교회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자기가 누구인줄 모르고,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면, 한나라가 혼돈에 휩사입니다.
기독교에 괸심있는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의 흉내만 내다가 자기 본성대로 살아버리면 결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잘못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정말 중요한가? 나의 본래모습도 보아야 합니다. 동시에 내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나아가서, 과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무엇이 중한디?”라고 스스로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신앙인응로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사람의 본질은 쉽게 배신하며 자기 중심적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1. 사람은 쉽게 돌아섭니다(배신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참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느 순간에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사람들이 아주 작은 일에 쉽게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실망하고 상처를 받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정상인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많이 봅니다. 저 역시도 교회에서 상처를 받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돌고 돌아서 마지막 자리에 가서 보면 알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 제 마음에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말 속담에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원한은 흐르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데 제 경우는 이 말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가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한은 바위에 새기듯 기억하고 은혜는 잘 잊으며 살아왔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이 우리 사람의 본래의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던 장면입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혀 있습니다. 이 때, 모세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출 14:13-14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그리고 결과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애굽 군대는 모두 수장되었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광야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가다가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신광야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 때. 이스라엘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출 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들은 얼마 전에 홍해를 건너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먹을 것을 놓고 불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저들에게 만나와 메추리를 통해 저들이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한가지 이삭 줍기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는 조금 각도가 다르긴 하지만, 만나를 공급해 주시는 부분입니다. 성경은 만나를 공급 해 주심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 16:26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주중에는 매일 만나를 공급받지만, 안식일에는 만나를 공급받을 수 없고, 대신 여섯째 날에 곱절을 거둘 수 있으며 보고나 하여 안식일에도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준비하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주기도문의 말씀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주님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게 하십니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 하라고 하십니다.
마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2.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입니다.
사람이 자기 중심이라는 이야기는 철저히 자기에게 주어지는 유익을 위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사울이 왕이 되고 아말렉과 싸우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를 사울은 자기 망므대로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삼상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그리고 사무엘이 왜 그랬댜고 묻자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삼상 15:20-21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이 말을 들은 사무엘이 답답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는 것보다 우리 자신의 욕심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쉽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처럼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성을 믿지 마십시다. 우리는 잘 잊고, 쉽게 돌아서는 본성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보다, 현실의 어려움을 보며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동시에 철저히 나 중심으로 살면서 하난미의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순종보다는 내가 원하는 불순종을 택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오랜 고전 중에,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기억하십니까? 그 책 속에서 톨스토이가 말하고 싶었던 사람이 가장 필요로 하는 삶의 기본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고 싶습니다. “신앙인/성도/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되묻고 싶은 것이겠지요? 진심으로, 성도는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요? 저는 믿음으로 산다고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빌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우리가 생각 해 봐야 할 것은, 과연 누가 의인이라 불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의인입니까? 기본적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세상에 의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롬 3:10-12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런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른다는 것이겠지요.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갈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들을 잘 살펴보면 알게 되는 것은, 믿음과 의가 분리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믿음이 있어야 의인이 된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야고보사도의 한 마디 외침입니다.
약 2: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알고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행위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를 알수도 있고 알릴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안디옥 교회 ㅛ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행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들이 단순히 말씀을 배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우리가 생각 해 보면, 그 지역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비켜 보면서, “아! 저들은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인정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행위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게 만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것은, 행위가 성도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참 성도가 되어야 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위를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하지 말고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그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 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진짜 그리스도인인가?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처럼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래 전에, 한국을 가는 중에 비행기 안에서 성경을 펴고 읽고 있었습니다. 잠시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섰는데 어떤 통로에서 마주친 한 자매님이 제게 “목사님이신가 봐요!” 라고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렇다고 하자, 제게 명함을주시면서 한번 자신의 사무실로 찾아와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이름도 생각나지 않지만, 한 동안 그 날일을 기억하면서 저는 스스로에게 “너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목사 같아 보인다!”라고 최면을 걸고 목사같이 지낸 시간이 있었습니다.
“목사 같아 보이는…”여러분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떨 것 같습니까?
한 번은 한국을 아내와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함께 버스를 타고 거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앞에 앉아 있던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자매가 일어나더니 저보고 앉으라고 하는 겁니다. 아내와 저는 놀라서 괜찮다고 앉아서 가라고 하고 계속 아내와 버스를 타고 가던 길을 갔습니다. 집에 와서 저는 거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내 얼굴을 남이 보면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를 보았는데 얼굴 한 구석에 숨어있던 검버섯이 보입니다. 마음은 아직 젊은데 제 모습을 구석 구석 살펴보니 영락없는 할아버지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종종 보여지는 것과는 다를 수 있고, 내가 원하는 모습과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가 하는 것보다는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습니다. 남이 나를 좋은 성도로 보아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누구라고 인정하시는가?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기위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경고하십니까?
마 7:22-23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았다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 해도 정작 주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은,
Ø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의 삶이 무엇을 본받는 삶이었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그러면 여기서 사도 바울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돌아 보기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빌립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이 때, 모든 사람들이 바울의 여행을 막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주으니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행 21: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지를 물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 자신의 죽음과 고난 받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때, 베드로가 펄쩍 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우리가 이 두 경우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바울 역시 같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어덯게 보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더 중요함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동안 릭워렌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 한국교회를 휩슬고 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목적”을 말합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따른다!”는 말이 가지는 가장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발자국을 포갠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의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젹으로 주님의 삶을 복사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초대 교부중의 한 사람이었던, 토마스아켐피스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런데 이 책의 원어는 “De Imitatione Christi” “그리스도를 모방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바울사도는 무엇이라고 표현합니까?
고후 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바울사도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합니다. 꽃의 아름다움이 모습에서도 나타나지만, 꽃의 꽃다움은 “향기”에서도 나타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향기는 명품 향수의 향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마 5:13-14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저는 이 말씀을 더올릴 때마다 항상 두려움을 가집니다. 그 이유는 제 나름대로 소금과 빛을 해석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소금”을 말 그대로 “맛”이라 해석합니다. 그리고 “빛”을 “멋”이라 해석합니다. 그리고 제 마음 속에서 성도를 볼 때, 맛 있는 사람 멋 잇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만날수록 반나고 싶지 않은 맛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가까이하면 나마저 천해지는 것과 같은 추접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라고 하면,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사람이 피하는 사람이 도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되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인 척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인다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오늘은 한가지만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그분의 삶을 복사하는 삶이 나의 삶이 되도록 하면 우리는 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 능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힘들어서 성령 충만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성도의 모습을 지키며 살 수 없기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쉽개 변합니다. 변한다는 말 보다는 배신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까요? 많은 분들이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해도 삶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어려움이 닥치기 전에는…
사람은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은 하지만, 성도가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이 너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니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어찌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무엇이 중요할까요?
성도로 살아가는 방법은 그분이 살았던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기로 작정하고 그분의 삶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중요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