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 101] 마라의 쓴물이 말하는 것들 (출 15:22-27)
혹시 여러분들 중에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안 들어 주신다고 하나님에게 섭섭함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이 있습니까? 아니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반항 해 보신 분들은 안계십니까? 하나님에게 기도 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생각되어 욕심 없이 기도 했는데, 오히려 욕심으로 기도 한 사람이 더 많이 가지는 것을 보고 허탈함으로 하나님에게 실망 한 적은 없습니까?
그럼 이렇게 젖ㅂ근 해 봅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릴 때, 하나님은 계획이 있는 분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다면 하나님은 그 속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어떤 뜻을 가지고 있으신 것은 아니겠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저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렀던 430년에 애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희망이라고 살았을까? 그러나 그 뜻이 하늘에 있음에 그저 순종하듯 하루를 살았다고 생각 합니다. 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가 여러가지 삶의 문제 속에서 하나님에게 섭섭함을 갖게 되는 경우, 그리고 그런 문제들을 통해 계획이 있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려고 하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일단 출애굽에 성공을 했습니다. 더이상 따라오는 애굽 군대도 없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이스라엘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시작된 행군이 3일째 되던 날, 이스라엘의 첫번째 불평이 시작 됩니다.
출 15:22-23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광야길을 3일을 갔는데, 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앞에서 인도하는 모세에게 불평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불평합니다.
출 15: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이 말씀에서 여러분들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느끼십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표적을 인간은 기적으로 봅니다.
헬라어의 표적이란 말은 “shmei'on” 이라고 하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단어의 뜻이 “기적”이란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sign”이란 뜻을 가진 표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표적(sign)으로 주시지만,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싸인보다 당장에 필요한 기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과 3일 전에 하나님은 애굽군대를 뒤로하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홍해를 둘로 나누어 마른땅을 건너듯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3일만에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에게 “물이 써서 먹을수 없음”을 불평합니다.
출 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이것이 잘못 된 것일까요? 아이가 배고프다고 우는 것을 잘못 되었다고 야단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홍해를 나누시는 능력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앞에 쓴물을 놔두셨습니다. 충분히 마실 수 있는 물로 바꿔 놓으실 수 있었는데 그리하지 않으시고 마실 수 없는 물로 놔두셨습니다. 그리고 이 쓴 물 앞에서 이스라엘은 모세를 원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왜지?”라고 질문 해야합니다.
1) 기적을 원하느냐? 하나님을 믿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통해 홍해를 건넜습니다. 저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통해 하난미을 믿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은 기적일 뿐,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주님이 오병이어로 사람들을 먹이신 후에 하셨던 말씀이 오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막 8: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사실은 은혜가 있는 사람들은 기적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요 2: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어떤 사람들은 기적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이야기힙니다. 즉 오늘 마라의 쓴 물을 통해 하나님이 알고 싶으셨던 것은, 백성들의 믿음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현실에 마라의 쓴물과 같은 어려움이 닥쳤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심을 믿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까요? 그런 면에서 마라의 쓴물이 주는 의미는,
2) 오늘 나의 믿음의 자리는 어디인가?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을 하게 된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해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해굽에서 도망쳐 나와서 수일간을 애굽군대가 따라올 것을 알았기에 정신없이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넌 후, 3일간을 광야길을 걸었습니다. 당연히 물을 찾았을 것이고, 그 물을 얻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습니까?
우리 인생을 보면, 오늘 나오는 “마라의 물”처럼 쓴 맛이라 생각이 듭니다. 물질적으로, 건강상 혹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나름대로 마라의 쓴물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금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먹을 물이 없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았다면, 그들이 했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물론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중에, 삶의 현장에 “마라의 슨 물”을 앞에 놓고 살아가는, 현실이란 벽 앞에 걱정과 염려로 주저하고 있는, 우리가 한 번 더 확인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다음 절에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는지 다 아실 것입니다.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우리는 성경은 잘 알고 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 앞에서 믿음을 앞 세우고 나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현실 앞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앞세우고 살아가는지를 스스로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의 현실 속에서 믿음과 우리의 삶이 따로 움직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삶의 무게를 항상 힘겹게 느끼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기적은 참으로 큰 힘이 됩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가 할일과 하나님이 하실 일을 구별하게 하고, 내가 할일을 한 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합니다.
왜 3일길을 갔는데 먹지 못할 마라의 쓴물을 경험하게 하셨느냐구요?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기적을 바라느냐? 내가 너의 하나님을 믿느냐?는 질문을 우리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믿음의 이유는 기적입니까? 하나님의 표적입니까?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가?
두번째 마라에서 던져진 나무 속에 그리스도를 보라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출 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 구절을 보면, 당연히 쓴 물을 먹을 수 있는 물로 바꾸어 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26절에 가서 보면 조금 생뚱맞은 설명이 나옵니다.
출 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치료 하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물론 광야 생활에서 마실 물이 없다는 죽음에 이르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쓴 물을 먹을 수 있는 물로 만드는데 사용한 것은 “나무” 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나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은 그냥 나무라고 하지 않고, “한 나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조금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쓴 물은 마실 수가 없으니 죽음에 이르는 물이라고 하면, “한 나무”는 마실 수 있는 물로 마꾸었으니 생명의 물로 만든 것이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생명 나무”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2장의 말씀입니다.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나님이 마라의 쓴 물에 던지라 명했던 그 “한 나무”는 이스라엘을 살리시 위한 생명 나무었습니다. 여기서 “한 나무”가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 우리는 26절의 “치료하는 여호와”를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의 말씀입니다.
사 53:4-5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 하신 “한 나무”, 땅에서 꺾여 물에 던져 짐으로 이스라엘에 먹을 물을 주신 분입니다. 실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신 적도 있습니다.
요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 하면서 우리가 가장 필요한 것이 없어서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보려고 합니까? 내 문제가 해결 되기를 원합니까?
저는 오늘 말씀이 전하는 입장에서 부끄럽습니다. 이유는 지나간 주간에 아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 아들이 제게 했던 이야기 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아이가 회사에서 진급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험 준비는 하지 않고 자꾸 나가 교회 친구들하고 어울립니다. 새벽부터 성경공부 한다고 하면서 정작 자기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새해에 아이들이 절을 하면서 새해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 할 때에도 금년엔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잘못 됐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준비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아이가 두 가지 일유를 말합니다. 첫째는, 일 하기 싫어서 대충 할 때에도 좋은 결과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하나님이 도와 주시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가, 제 마음을 찔렀습니다. 내가 진급하려고 하는 방향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인지 조금 더 기도하고 기다려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준비 해오지 않았느냐? 아이가 대답을 합니다. 일하기 싫을 때도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과연 내가 하려고 하는 이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일까? 아니면 단순히 돈을 벌기위한 일일까? 스스로에게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더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할말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면, 그 분이 우리를 치유 하시고,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고, 우리의 가야할 방향을 지시하실텐데, 잘되는 순간에는 감사하지만, 더 잘되기 위해 하나님을 팔아먹는 일을 제가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말씀 드린다면, 우리 인생에 감당하기 어려운 쓴물과 같은 장애물이 우리 앞을 막았을 때, 우리는 기적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 해야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바라보며 더욱 깊은 믿음의 자리로 나가야 할까요? 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기 위해 성경이 말씀 하시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인생 가운데서 생명의 그리스도를 보기 원하시면,
·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 보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이 보입니다.
롯의 선택으로 조금은 섭섭할 수 있는 아므랍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 하시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약속을 주시는 장면입니다.
창 13:14-15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 눈을 들어 살펴 보십시오.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보입니다.
하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할 때, 그 믿음을 보신 하나님으 ㄴ네것이 아니어도 된다고 하시는 것같습니다. 내가 준비 했다. 말씀 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 눈을 들어 하나님이 일하실 때까지 보십시오.
엘리야에게 응답하신 하나님, 그럼에도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는 것 같을때, 엘리야는 일곱번 까지 사환을 보내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확인 합니다.
왕상 18:43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 눈을 들어 하나님이 지키심을 보십시오.
게하시가 하나님의 지키심을 보지 못할 때, 엘리사가 그의 눈을 열게 해 달라고 기도 한 후에, 산에 가득한 하나님으 ㅣ군사를 보게 하십니다.
왕하 6: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저는 우리 모두 우리에게 주어진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주님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계획이 있으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분입니다. 우리의 삶을 위해 준비 해 주신 분입니다. 우리의 눈은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기대하는 눈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린 이런 하나님을, 이런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앞에 “넘사벽”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넘사벽”으로 인한 절망 보다는 그리스도를 보며,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쓴 물을 마실 수 있는 생명의 물로 만드실 수 있는 붑입니다.
쓰디쓴 세상에서, 일어서기 힘든 삶의 무게를 지고 가는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귀한 은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율법과 계명(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삶)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부모들은 지녀를 양육하다 보면, 칭찬도 용서도 좋지만 종종 매를 들거나 혼을 낼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부모들은 “이거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을 하곤 합니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자기의 자녀를 키울 때까지 그것이 거짓인 것처럼 생각하고 자라기도 합니다. 26절 말씀입니다.
출 15:26a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몇가지 말씀 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순종,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함, 계명에 귀를 길일 것 그리고 모든 규례를 지키라”는 것을 명령 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이 말들이 각기 다른 말이 아니라 한마디 인것을 이렇게 여러가지로 표현 하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삶”이란 말로 표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다가 따르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목이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막 6:37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그런데 이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 6:8-9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비록 확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지만, 우리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보이셨습니까? 우리 삶의 문제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경우에 문제 해결의 방법은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도단 성에 있었을 때 입니다. 아람군대가 도단성을 포위하고 성내로 공급하는 모든 길을 막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성 안에서는 서로의 아기까지 죽여서 먹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 때, 엘리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왕하 7:1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전에 아람의 포위 아래 있었을 때, 먹을 것이 귀해 가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던 것 같습니다.
왕하 6:25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하니
나귀 고기도 아니고 나귀 머리가 은팔십 세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합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나귀 고기”는 율법상 금지된 것(참조, 레 4:11)일 뿐 아니라 맛이나 영양이 별로 없었으므로 평상시에는 식용 고기로 사용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절박한 상황이었으므로 가장 먹을 것이 없는 나귀 머리통 하나가 일반 노동자의 4일치 품삯에 해당하는 은 80세겔에 거래된 것이었습니다. 또한 비둘기의 똥 역시 고가로 거래되었는데 “갑”은 히브리인의 가장 적은 계량 기준으로서 약 오늘이 1.3리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엘리사 선지자가 고운 밀가루 한 스아와 보리가루 두 스아가 한 세겔로 거래 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엘리사를 시켜 선포한 말을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시기로 하셨으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법은 하나님이 결정 하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믿는가? 안 믿는가? 이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래 전에 GOD의 노래 중에 “어머님께…”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 처음이 이렇게 시작 됩니다.
어려서 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 남들 다하는 외식 몇번 한적이 없었고
일터에 나가신 어머니 집에 없으면 /언제나 혼자서 끊여 먹었던 라면
그러자 라면이 너무 지겨웠어 / 맛있는 것좀 먹자고 대들었었어
그러자 어머님이 마지 못해 꺼내신 / 숨겨두신 비상금으로 시켜주신
자장면 하나에 너무나 행복했었어 / 하지만 어머님은 왠지 드시지 않았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과연 이 노래에 등장하는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었을까요? 어머니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들을 위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그 계명과 율법은 우리가 정말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축복의 통로가 아닐까요?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살아 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속마음이 아닐까요?
그 때까지 모세의 말만 듣고 온 이스라엘 이었습니다. 그 백성들에게 이제 부터는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 하시는 안타까운 하나님의 부탁은 아닐까요?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이제부터는 사역자나 혹은 영적 지도자라는 누구를 보기보다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를 보며 살아가면 안 되겠니?라고 물으시는, 말씀 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우리 삶에 어려움이 가로막을 때마다 기적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어려움을 해결 해 주시면서 우리에게 기대 하시는 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표적으로 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쓴물 앞에서 한 나무를 통해 광야에서 살 수 있는 생명수를 공급 해주심을 통해 우리로 그리스도를 보게 하십니다. 이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서 고통 당하시고, 우리 삶에 치유함을 주신 분입니다.
계명과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하십니다. 삶의 문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대신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보다 영원한 천국에서 더 잘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나의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 할수 없는 어려움으로 막혀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기적보다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표적을 보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마음에 힘을 얻고 일어 설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한 가지 더, 위에게 계명과 율법을 주신 것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는 부담스러울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중에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바라기는 이번 한 주간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힘을 얻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영적으로 승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