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 101] 뺑뺑이 도는 삶과 하나님의 계획 (창 12:1-7)
오래 전, 노래 가사 중에 “내 인생은 나의 것”이란 가삿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사를 즐기며 살지 못하는 사람이 꽤 많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면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과연 나의 인생이 내 것이라고 한다면,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면서도 결국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이죠. 선지자 이사야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 55:8-9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시는 음성을 들을수 있습니다. 사실 다르다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더 높고 높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다시금 생각 해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2021년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는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세운 계획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포함시키지 않으면 우리의 계획은 이루어 질 수 없는 계획으로 끝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2021년, 우린 각자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고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마음의 분주함으로 계획을 세우고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 주가 지난 오늘, 어쩌면 설교라기 보다는 그저 성경의 이야기를 줄줄 풀어가는 것으로 들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문득, 아브라함을 생각하면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말씀들을 떠 올려 보게 되었습니다. 이유 중의 하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선택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 속에 “왜? 아브라함!” 이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어떤 모습을 보시고 선택하신 것일까? 하는 의문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했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 어디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탁월한 믿음이라고 하는 부분은 나중에 모리아산에서 보여지는 것이니까 대략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후, 40년 정도 지난 이후로 추정됩니다. 다시말해서, 이 모든 일들은 선택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선택의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저 나름대로 이 부분을 꾸준히 생각하며 묻다가 내린 결론은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이 말은 다르게 표현하면, “누구든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다는 것. 그렇게 오늘 말씀을 풀어보려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후, 그를 축복하셨다는 “사실(fact)”이며, “진실(truth)”에서 출발해 봅니다.
첫번 축복의 말씀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입니다.
다시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축복은 사실이며 동시에 진실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항상 기억하고 오늘 말씀을 들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신 것처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때가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가나안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 후,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 이삭을 얻었습니다. 25년 지났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60세 되어서 야곱을 얻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지 85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애굽으로 넘어간 때가 야곱의 나이 130세였습니다. 215년 되었습니다. 그 후, 출애굽까지 430년을 애굽에 살게 되었습니다. 총 645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돌아다니다가 결국 가나안에 돌아옵니다. 가나안의 정복 전쟁은 약 16년 정도 걸렸습니다. 전체적으로 701년, 약 700년에 걸친 하나님의 계획이 마무리되어 가는 순간입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만들기는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을 통해 애굽에서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을 통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으로 감으로 말미암아 무슨 일이 생겨난 것일까요?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을 태동하게 하셨습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후손만을 애굽에서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않도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한 가지 여기서 우리가 더 깊이 생각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애굽에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하나님 모르는 자들로 살아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출 6: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이 말씀 기억하십니까? 여기서 사용되는 신음이란 히브리 말은 “neh-aw-kaw”라는 말인데, 그 뜻은 “힘들어서 내는 신음 소리”입니다. 즉 하나님에게 부르짖는 신음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저들에게 하나님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하루 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상황이었던 듯 싶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황으로 만들어가신 하나님!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민족이 되게한 후, 하나님을 각인시켜 가시는 것일까요?
이 답은 나중에 생각해 보도록 하고, 지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민족을 만드셨다는 사실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경은 애굽으로 내려간 사람들이 몇사람이었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창 46:26
야곱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자는 야곱의 며느리들 외에 육십육 명이니 이는 다 야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이며
며느리 외에 66명인데 그들이 다 누구라고 합니까? 애곱의 몸에서 태어난 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곧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이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애굽에서 살아남습니다.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세러 기록한 것이 민수기 1:20-46에 나타나 있는데, 그 수가 603,550 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숫자는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자의 수를 계산한 것이기 때문에, 노인과 여자 그리고 어린이를 포함하면 대략 2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합니다. 어쨌든, 이들은 다 야곱의 직계 혈통이었던 것으로 봐야 하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처음에 주셨던 약속,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는 약속을 이루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약속하신 아들 이삭을 위해 이스마엘을 떠나게 하셨고, 야곱을 위해서는 에서를 물질적으로 축복하여 야곱이 하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후손만으로 약속하신 한 민족을 이루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믿겠다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렘 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하나님은 우리의 계획 혹은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우리를 예정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하나님의 자녀 됨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설혹 내가 믿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성취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거부할 때,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너는 돌보다 못한 놈”이라고 책망하시지 않을까요?
아브라함의 선택부터 그의 후손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그 때를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진행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약속을 받은자로서, 축복받은 사람으로, 그리고 믿음의 사람으로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기준은 탁월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기준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시고 사용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도니 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선택을 넘어 쓰임 받는 축복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번째 축복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축복입니다.
지금은 축복의 통로라는 말이 훨씬 지연스러워졌지만, 제가 처음 이 구절의 해석을 들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축복의 근원의 복” 이라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런 일들은 우리가 잘못 해석하면 멍청한 짓을 하게 됩니다. 예를들어서, 목회자한테 함부로 하는 집안에는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또, 목회자에게 잘하는 가정은 자녀도 잘되고 사업도 잘 된다. 저는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님을 보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틀린 것 같은데 여러분은 조금 부담스러우시죠?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줄 아십니까? 여기서 우리가 바르게 알아야하는 것은, 목회자에게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이것을 구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누군가가 막는다면 그 일은 하나님이 처리하실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삶 가운데 복과 화를 가지고 함께 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나안으로 갑니다. 이를 방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의 진행을 돕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은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갔다가, 가나안에 닥친 흉년으로 인해서 애굽으로 피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라가 애굽왕 바로의 눈에 띄어 아내를 빼앗길 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때의 일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하나님이 바로의 집안에 재앙을 내리신 이유는, 바로가 본의 아니게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애굽의 바로가 그 군대를 통원해 이스라엘을 잡으려 합니다. 이 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이라고 이야기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출 14:13-14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저들을 홍해에서 수장시키신 이유는 단순히 히스라엘을 쫓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행하시는 일을 애굽 군대가 막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힐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더 말씀드릴까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가는 중에, 가는 거리를 줄이기 위해 에돔 땅으로 질러가기를 에돔 왕에게 청합니다. 그러나 거절당합니다.
민 20:18
에돔 왕이 대답하되 너는 우리 가운데로 지나가지 못하리라 내가 칼을 들고 나아가 너를 대적할까 하노라
그 후에, 이스라엘은 먼길을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국에 보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의 진행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에돔이 막은 것은 하나님의 길을 막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민 24:18
그의 원수 에돔은 그들의 유산이 되며 그의 원수 세일도 그들의 유산이 되고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에돔은 결국 이스라엘의 유산이 된다고 말합니다. 다시말해 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돕는자. 하나님의 일을 막는자, 과연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막는 자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입니까?
우리는 베드로를 기억합니다. 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한 고백을 했거, 예수님께 칭찬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이 가셔야 하는 고난과 죽음의 길을 막아서려 할 때, 주님은 그에게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제자의 입장에서는 분명 베드로의 생각이 옳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 생각이 틀린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복을 받고 누가 벌을 받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세상에서 말하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며 순종할 것인지 내 생각을 앞세울 것일지를 결정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 혹은 “축복의 근원의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액속을 붙잡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홥니다.
마지막으로, 축복의 말씀은 땅(기업)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혹은 구약성경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요즘 한국교회에 유행하는 “가나안”은 더 이상 “하나님의 약속”이란 의미가 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가나안” 이라는 기업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아브라함을 자시느이 고향에서 떠나도록 하십니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결국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한 땅, 그 민족이 돌아와야 하는 땅이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가지 가나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창 12:4-5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창 12: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저는 이 부분을 꽤 오랜 시간 생각 해 온것 같습니다. 왜 하나님은 결국에는 돌아올 땅, 가나안을 약속의 땅이라고 하셨던 것일까?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할 때까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은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너로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 “축복의 통로로 삼겠다는 약속” 그리고 “네가 머문 이 땅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약속, 이 세가지를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들 중에 아브라함이 스스로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시고 행하신 것입니다.
제가 다른 부분은 다 쉽게 인정이 되는데, 가나안에 대한 부분은 정말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굳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으로 옮겨 가게 하신 후에, 230년에 걸쳐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가게 하시고 430년 동안 애굽에 머물게 하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한 이유가 무엇인가?
제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충분히 아브라함이 살아 있는 동안에 가나안의 모든 것을 다 멸하게 하시고 아브라함으로 새 민족을 만들 수도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700년에 걸쳐,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이후에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이 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선포하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십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들은 하나님이 누군지도 잊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고 축복받고 인도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던 그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과 들어간 후에 이스라엘에게 알게 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1) 가나안은 이스라엘에게는 약속의 땅이었지만, 하나님에게는 약속 그 자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 대해,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하난미이 주신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직접 약속을 주셨습니다. 때문에 이 약속을 스스로 지키지 않으시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가나안은 우리에게는 단순한 약속의 땅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들어내는 사건입니다.
신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우리가기억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혹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가나안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내가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과연 나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앿고을 주신 것이며, 그렇게 살게 하시는 것임을 우리는 믿어야합니다.
2)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믿음의 사람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처음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결국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믿음을 보여주었음을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롬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가나안은 그저 단순한 약속의 땅이 아니라 바랄 수 없는 중에 배라고 믿은 믿음의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믿음은 믿을 수 있는 상황에서 믿는 믿음이 아니라 바랄 수 없는 중에 배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오늘 가나안은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갈 수 있는 땅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일방적인 약속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700년에 걸친 계획을 통해 아브라함의 후손을 따로 구별하셨고, 하나님의 길을 막는 자에게는 벌을, 하나님의 일을 돕는 자에게는 복을 주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출ㄹ애굽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 했음에도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20세 이상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죽게 되었고, 약속하신 땅에 들어간 사람들은 새시대, (New Generation) 이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즉 가나안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성취이기도 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약속의 자리에 들어가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뺑뺑이 돌리는 하나님의 짖궂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짖궂음 속에서도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말슴 하시는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과연 나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지금도 하나님이 나의 인생 속에서 나를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 믿음의 사람인가? 바랄 수 없는 현실이 나를 막아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내 삶 속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내 삶 속에서 일하심과, 내가 그분의 인도하심 속에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인가?
내 인생이 뺑뺑이 도는 것 같이 피곤해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며 우리는 하나님이 지키시는 약속의 자리에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기는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믿고 기대하는 하나님의 뱅성 되어서, 뺑뺑이를 돌아도 하나님이 나의 삶 속에서 일하심을 믿기에 감사하고, 행복한 하루 하루를 이기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