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기 그리고 사명(누가복음 2:1-7, 이사야 9:6)
두 아이가 서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먼저 한 아이가 산타클로스에 대해 말합니다. “산타클로스는 진짜로 있어!” 다른 아이는 자기가 특별한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자 다른 아이가 “산타클로스는 없어!”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는 아이가 엄마에게 달려가서 묻습니다. “엄마! 산타클로스 있지?” 엄마가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합니다. “없어!” 이 말을 들은 아이는 속이 상해하며 웁니다. 영문을 알지 못하는 엄마는 아이에게 묻습니다. “왜? 무슨 일이니?” 아이가 울며 이야기 합니다. “산타클로스가 없으면 내 선물 없잖아!” 성탄절은 선물을 받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에게 성탄절은 어떤 날입니까?
제가 어렸을 때 까지만 해도 먹는 것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이 되면 교회에서 맛있는 것을 줍니다. 그래서 동네의 대부분의 꼬마들이 성탄절이 되면 교회에 모였습니다. 특히 일년동안 열심히 교회에 출석한 아이들에게는 푸짐한 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지나고 나면 내년에는 열심히 다녀야지 하는 마음을 가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2013년을 다 지내고 새해를 앞두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성탄절은 어떤 의미입니까?
지난 날을 돌아보면, 한국교회에서의 성탄절은 되면 무척 바빴습니다. 각종의 행사로 분주하고, 주일학교부터 어른에 이르기 까지 성탄행사는 모든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참석하는 행사였던 것 같습니다. 각 기관별로 성탄 발표회가 줄을 잇고,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이곳 저곳으로 흩어져 행사를 가졌습니다. 크리스마스 새벽에는 새벽송을 돌았고, 성탄절 새벽에 드리는 촛불예배 중에는 졸다가 머리를 태워먹는 일도, 앞 사람 옷에 촛농을 떨어뜨리는 일도 그리고 졸다가 남의 혹은 자기의 옷을 때우던 일도 성탄절에만 겪을 수 있었던 추억들입니다.
추운 성탄절 새벽에 새벽 송을 돌다가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서 따뜻한 떡국을 먹고 나오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따듯하게 느껴졌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너무 분주해서 성탄의 마음은 없고 행사만 남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실 지금 그때를 돌이켜 보면 그 때는 성탄절이 어떤 절기인지 생각해 볼 여우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한국을 방문한 시기가 11월 말쯤이었는데, 그 때, 제가 방문한 교회가 1000여명이 모이는 중형 교회임에도 성탄 장식을 할 사람이 없다고 전도사님들이 장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엇인가 모를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저는 성탄절이 이래야 한다 혹은 저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저는 여러분에게 이 성탄절이 분주하다 혹은 조용하다 그런 것 보다는, 마음에 잔잔한 기쁨이 느껴지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성탄절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소란함과 더불어 이런 저런 잔치기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주님이 오신 이 절기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참 된 기쁨의, 기쁨의 그리고 감사의 절기가 되시고, 이 절기를 통해 하늘의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그 당시에 로마 제국은 동쪽으로는 페르시아, 서쪽으로는 영국에 이르기까지, 전에 없이 세력이 뻗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로마 제국은 온 세계의 제국이라 불리기 까지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로마제국을 천하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 당시 로마에 속해 있던 나라를 제외하고는 문명화 된 곳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막강한 나라 로마의 지배자는 아우구스도 황제였습니다.
그가 호적 조사를 실시하게 된 이유는, 자기 백성들의 수를 알고, 더 나아가 그것을 세상에 공포함으로써, 자만심을 채우기 위해서 였을 수도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책적으로 그 일을 실행하여 자신의 통치가 더욱 막강해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이 된지는 이미 60년이 지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옛날에 이스라엘이 모세에 의해 구원 되었듯, 새로운 구원자, 즉 메시아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의 메시가가 되신 예수님은 유대의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서, 힘없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그나마 머물 곳 없는 상황에서 말구유에 몸을 담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구원자를 필요로 할 때 나타나신 예수님/ 그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 때에 오신 예수님, 그러나 그는 저들을 구원하는 메시아로서의 모습을 하나도 보이지 못하고 세상에 오셨으며,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세상을 살다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하늘로 가셨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묵상하면서 왜 예수님은 그때에 오셔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실 것입니다만, 유대인들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평범한 한 사람의 의인으로 생각 합니다. 이토록 자신의 백성에게 조차 인정 받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 때에 평범한 모습으로 오셔야 했던 이유가 무었 이었을까요? 그리고 이 성탄절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오십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 하시고 계신 것일까요?
첫째로,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때를 생각하게 합니다.
1)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때에 관해서 말하는 것 중에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많이 듣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같이 한번 따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일에 때가 있다.”
오늘 1절 말씀에도 보면 “이 때에…”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특별한 의미로 사용된 단어는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단어 속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왜, 혹은 무엇 때문인지는 알지 못해도 “때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4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 하셨다가 포도주가 없다고 하는 말을 전해 듣고 무어라고 말씀 하십니까?
요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Dear woman, why do you involve me?" Jesus replied. "My time has not yet come."
여기서는 사역의 때를 말씀 하시고 계십니다.
다른 곳, 요한복음 7:30에 보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때 상황에 대해 사도 요한은 무엇이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까?
요 7: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At this they tried to seize him, but no one laid a hand on him, because his time had not yet come.
여기서 요한은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à 이것은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를 지실 때가 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일을 하시는데도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것도 때가 있었습니다. 마찬 가지로 예수님이 오시는데도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축복하심도 때를 따라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돕는 은혜를 이렇게 소개 합니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Let us then approach the throne of grace with confidence, so that we may receive mercy and find grace to help us in our time of need.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냥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때를 누가 정하는가?하는 것입니다.
2) 그 때는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 오시는 시간은 누가 정했습니까?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던 때는 이스라엘의 번성하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로마의 점령 하에서 어려움을 겪던 시기 였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려면 이스라엘의 번영의 시기에, 화려한 모습으로 궁정에서 태어났어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 그런 모습으로 오지 않으시고, 정말 주님이 필요한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때에 대해 궁금함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행 1:6-7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So when they met together, they asked him, "Lord, are you at this time going to restore the kingdom to Israel?" He said to them: "It is not for you to know the times or dates the Father has set by his own authority.
하나님의 때는 하나님이 직접 정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우리가 믿고 있는데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때는 누가 정합니까?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하나님의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주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 하다가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금 나는 주님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데…. 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 하시는 것은 아닐까? “그건 네 생각이고….”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주님은 주님의 계획하신 때에 주님의 계획대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를 정하심에 있어서 우리가 확실히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3) 때를 정하신 데에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런 때,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 아래 있었던 그 때에 오셨을까요?
눅 2:4-5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So Joseph also went up from the town of Nazareth in Galilee to Judea, to Bethlehem the town of David, because he belonged to the house and line of David. He went there to register with Mary, who was pledged to be married to him and was expecting a child.
이 때는 호적을 해야 했던 그 때입니다. 말씀대로 라면 이 호적을 올리는 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고향은 베들레헴이라는 것이 증명 된 것입니다. 역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호적 조사는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때문에 여기서 예수님의 고향이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었으며, 이는 예수님이 훗날 메시아임을 증명하는데 여러 가지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미가서에 보면,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But you, Bethlehem Ephrathah, though you are small among the clans of Judah, out of you will come for me one who will be ruler over Israel, whose origins are from of old, from ancient times."
이 말씀에 의하면 메시아에 대한 예언에서 그의 탄생 장소가 예언되어 있고, 그곳이 베들레헴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바로 그 때에 호적을 하라고 하는 일이 있었던 것도 필요한 일이었으며, 그 때에 예수님이 나셔서 호적을 올린 것도 예수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예언의 성취를 후대에 알게 하기 위해서 있어야 했던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 직접 정하십니다. 그리고 그 때를 정하신 뜻을 당시는 모를 수 있으나 반드시 그 속 뜻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지금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의 때의 한 복판에서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지난 삶을 돌아 보아 그 때 마다 여러분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감사하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때에 예수님은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For to us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will be on his shoulder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이사야의 말씀에 보면 당연히 예수님은 처음부터 우리 인간과 같은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올것이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이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알아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가 머물 곳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사관이라고 말하는 여관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단순한 여관이 아닙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여기 사관의 직접적인 의미는 여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케네스베일리라고 하는 학자는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에는 집안에 손님이 묵고 갈수 있는 “게스트 룸”이 있었다고 주장 합니다. 그리고 요셉이 찾아간 곳이 요셉과 상관 없는 곳이 아니라 고향이었다고 할 때에, 당연히 요셉이 찾아갈 친척의 집이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즉 요셉이 친척집을 찾아갔는데 친척집의 게스트룸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갈 곳이 없었다고 해석합니다. 따라서 우리 성경에는 마구간이라고 번역되고 있습니다마는 이 장소 역시, 당시의 사회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손님방의 옆에 붙어있는 다목적 방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친척집을 가득 채우고 있는 손님들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이 바깥에 있던 다용도실에 모셔진 것일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왕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사관의 주인은 혹은 이 친척은 바깥방 혹은 마굿간에 모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시를 감수 하시고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비록 예수님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메시아의 모습을 다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아기의 모습 속에서 다섯 가지의 모습을 설명 해 주고있습니다. 앞서 봉독 했던 이사야 9:6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어떻게 설명 하고 있습니까?
n 기묘자(wonderful)의 모습 à 놀라우신 예수님(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느낌)
n 모사(counselor)의 모습 à 마음의 안정을 주시는 예수님(문제로부터)
n 전능하신 하나님(the mighty God)의 모습 à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
n 영존하시는 아버지(everlasting Father)의 모습 à 끝까지 함께 하시는 예수님(임마누엘)
n 평강의 왕(prince of peace)의 모습 à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
여러분은 이상의 다섯 가지 모습 속에서 어떤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계십니까? 이런 예수님과 상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혹시 예수님을 내 속에 모시지 않고 빈방 없다고 밖에 놔두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케네스 베일리의 말을 대하면서, 처음에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나는 혹시 예수님께 게스트룸을 주지 않고 다목적 방을 내어준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생각하다 보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게스트룸에 머물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안방 매스터 베드룸에 들어 오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기의 모습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처음부터 존경을 받지 못했습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마음을 들여다 보고 이러한 우리 자신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당시에는 어린 아이로 오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마음으로 무시 했습니다. 오늘 날은 과학 덕분에 예수님을 무시합니다. 혹은 자신을 왕으로 삼아서 예수님을 무시합니다. 나는 그런 사람 아닌가?
하지만, 어린 아이로 오셨을지라도 그 예수님은 그의 삶을 통해서 우리 삶에 왕이시며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십니까? 바라기는 우리 삶에 주인이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마음 깊은 곳에서 되새기며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다시금 모시는 귀한 성탄 절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묘자(wonderful)의 모습, 모사(counselor)의 모습, 전능하신 하나님(the mighty God)의 모습, 영존하시는 아버지(everlasting Father), 평강의 왕(prince of peace)의 자격이 있으심을 보여 주십니다. 지금 우리 삶에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을 받아 들이셨습니까?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그의 일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마음으로 우리의 주변을 돌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셨으면서도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도 큰 변화를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흐름 속에서 죽은 듯 지내셨습니다. 만약에 오늘 같은 때에 예수님이 오셨다면 세상을 호령할 수 있었을 지도 무릅니다. 인터넷을 통해 세상이 그가 하신 일을 다 알게될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메시아의 한 일이라고 모두가 말 할테니 당연히 세상 사람들이 메시아라고 받아 들였을지도 모르겟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에 의해 크게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귀신을 내어쫓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였다고 해도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한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을 삼으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은 힘 없는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힘 없이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다. 비록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났지만 예수님은 박사들의 경배를 받으셨을 만큼 분명히 유대인의 왕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렇게 볼품 없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시작 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해 아무런 능력도 사옹해 보지 못하신채 십자가에 달려 생을 마감 하셨지만, 그의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흐름을 자신이 바꾸지는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었으며, 지금도 그가 하던 일은 누군가를 통해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누가 이 일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탄절에 왜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찾아 나서야 하는지 아십니까? 그들을 도움을 통해서 구들에게 생명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분이 하시기를 원하셨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성탄절을 기뻐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그 기쁨이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이 힘들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기를 원하셨었던 하나님이 주신 선물 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주님은 살아 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I tell you the truth, anyone who has faith in me will do what I have been doing. He will do even greater things than these, because I am going to the Father.
우리가 주님이 하셨던 일보다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 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오신 그 날을 생각하며 우리가 기억 해야 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남기고 가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전하라는 것, 교회는 기쁨과 소망을 주는 위로자의 사명이 있다는 것을 말씀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단순히 세상의 분위기에 휩쓸려 지나가는 그런 절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오신 이유, 내 속에 그분이 어디 계신지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때를 생각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다고 하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때를 그렇게 정하신 것도 알고 보면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면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때 하나님의 때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오신 모습이 일반적으로 상상하던 왕 같은 모습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마음 중앙에 모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왕으로 오셔서 큰 일을 하셨고 왕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을 완성 하지 않고 가셨습니다. 우리에게 당신이 하던 일을 이루어 달라고 맡기고 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오이코스가족 여러분!
삶의 현장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함께 함을 기억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그러나 그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힘주시고 위로 주심을 기억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기를 원하는 거룩한 사역이 있음도 기억 하십시오.
그런 우리 오이코스가족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가정과 직장, 또한 여러분에게 주신 사업 위에 아들까지도 주실만큼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넘쳐나시기를 축원합니다.